20250205 수요저녁예배 설교(사 4:1-6 / 남은 자의 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윤성천 목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용교회관련링크
본문
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NdLf25_nBdE?si=_jS4VGteaWH84qWS
유다의 죄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많이 붕괴되었고, 절망 가운데 있는 상황이었다.
2절에 보면 다시금 죄 가운데 빠져서 고통 받는 유다 백성들에게 희망과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여러가지 죄악으로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가장 큰 죄악은 우상숭배라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악을 지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지만 한편으로 회복의 기회를 주고 계신다.
1절은 심판 후에 얼마나 비참한가를 말씀해주고 있다.
2절에서는 소망의 희망이 시작되는데 여호와의 싹이다.
3-4절은 남은 자를 부르시는 내용이고
5-6절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에 대한 말씀이다.
1절
"그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우상숭배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날이다.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했다. 3장 16절부터 4장 1절까지는 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전쟁와 재앙을 인해서 모든 사회가 붕괴된 절망 가운데 있었다. 전쟁에서 많은 남자가 죽었기에 한 남자를 두고 일곱명의 여인이 결혼하자고 하는 상황이다. 오늘늘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군인만 30만명 가량이 전사했다. 당시에도 남자들이 많이 죽어서 남자들이 부족했다. 처녀와 과부들이 많았고, 자녀 없는 여인들이 많았다. 여인들이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라고 했는데, 당시는 남자들이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졌다. 그렇기에 결혼하지 않으면 여인들은 자신의 삶이 보장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들이 없기에 여인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 책임질테니 결혼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서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를 보여주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도 독일의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당시 여성들이 전쟁 폐허를 복구하는 일을 했는데, 그 여성들을 가리켜 잔해 여성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자들 없이 여성들만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 한 남자를 붙잡았다고 했는데, 이 한 남자가 누구일까? 세가지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이라고 보는 견해, 둘째는 강대국이라는 견해, 셋째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다. 문맥상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예수님이나 강대국을 인용할 수 있다. 수치를 면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당시에는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한다.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수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강대국과 같은 강한 힘을 의지하고, 돈이나 권세나 성공을 의지한다고 하면 잘못 선택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수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참 남자,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선택해서 그분과 결혼을 해야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여인은 자기 스스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2절 이하에서부터 보면 남은 자들을 붙잡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지만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셨는데, 가죽옷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우리도 영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수치 가운데 있는 것이다. 수치를 이제라도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 밖에 없다.
2절
전쟁과 재난으로 인해서 사회가 분열되고 영적으로 냉랭한 가운데 있었다. 모든 현상이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다시 "그 날"이 언급되고 있다. 그 날에 여호와이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잘려나간 그루터기에 새싹이 난 것이다. 그 싹을 가리켜 여호와의 싹이라고 했다(슥 3:8; 사 11:1). 예레미야 23:5에서는 가지라고 했다.
그러면 왜 여호와의 싹이라고 했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보잘 것 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다. 비록 작지만 거기에는 생명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 점점 자라나고 풍성해질 수 있다. 복음 운동이라는 것은 시작은 비록 미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장되고 풍성해지고 점점 많은 나라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아름답고 영화롭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구속 사역,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 사역을 이루어가시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영화롭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죄인이라고 해서, 반역자라고 해서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는 영적으로 아름답고 영화로운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존귀하고 가치가 있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 땅의 소산"도 영화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풍성한 열매를 상징한다. 그 땅에서 많은 소산이 나와서 남은 자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풍요로운 삶,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황폐했던 곳이 생명의 역사가 있는 곳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전과 달라져서 예배와 찬송하는 분위기가 될 것이다. 전에는 우상숭배를 하고 각종 부정과 부패로 정의가 무너졌었는데 하나님께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모은 것이 변화되어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고 남은 자들이다. 이들이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올 자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부터 남은 자에 대한 말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남은 자는 오늘날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를 가리킨다.
3절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는 심판 후에 살아남은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 가운데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을 가리킨다.
시온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주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를 가리킨다.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언약 백성이 거주하며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장소이다. 그 안에 생존한 자는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고 구원 받을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이사야 1:9에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시겠다고 하셨다. 이들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신다고 하셨다.
"기록된 모든 사람"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을 가리킨다. 성경 여러 곳에 생명책이 언급되는데 구원받은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생명책에 한번 기록되면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행위대로 한다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밖에 없다. 사람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늘의 상급이 된다.
거룩은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정결하다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된 신분으로 만드셨다.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서 따로 떼어 놓으셨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인데, 하나님께서 구별된 신분으로 분리하셨다는 것이다.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되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처음 믿었을 때와 오래 믿은 후에 변화된 것이 없으면 안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에 대해서 애통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회개해야 한다.
따로 세운 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다. 마귀가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5~46)
기독교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편을 가르고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거룩하게 칭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언하시고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의롭게 만들어 주셨다.
4절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시는 방법 두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심판하는 영, 다른 하나는 소멸하는 영이다. 이것으로 남아있는 자들을 정결하게 하신다. 심판하는 영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깨어 있으면 죄 짓는 것에 대해서 예민하게 자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깨어있지 않으면 죄를 지어놓고 죄를 지은 줄 모른다. 양심이 무뎌진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판단을 하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면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를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죄 짓지 않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지어놓고도 오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갈 때가 있다. 이것은 내 속에 성령의 감동과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도 악이 섞여 있다. 세상 일에도 명분을 잘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도 내 인격을 만드는 과정에서 명분은 잘 만드는데 그 속에 욕심과 자기 위하는 것,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들이 있다.
소멸하는 영은 심판과 정결의 의미가 있다. 부정한 것을 다 태워버린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부정한 것을 태우신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신다.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말 3:2~3)
우리에게 어려움과 환난과 힘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정금 같이 나오게 하시려고 연단하시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을 낯낯이 찾아 회개하라고 이런 고통과 환난과 시험을 주시는 것이다.
왜 심판이 필요한가?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기 위해서이다. 예루살렘의 피를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모습을 영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더러운 죄악들이 있다.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많은 자들을 괴롭히고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하나님께서 이 죄를 회개 시키신다.
우리의 관계가 원만한가?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과 예루살렘의 피가 그 속에 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성령,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가능하다. 성령의 인도함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5절
시온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낮에 강한 햇빛을 환난을 의미한다. 그때 구름으로 보호해주신다. 밤에는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인데 빛으로 밝혀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따뜻한 위로를 주신다. 환난 중에도, 캄캄한 중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인도해주신다.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신랑 신부가 거처하는 초막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는데, 거하신다는 것이 초막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영광으로 덮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 가운데 살 수 있다. 환난과 어두운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인도해주고 계신다.
6절
초막은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보호와 돌봄과 안전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장막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고 했다. 더울 때나 바람이 불 때 초막에 들어가면 위로와 힘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주님 안에 거하면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두렵고 떨리는 일이 많더라도 주님 안에 있으면 평안할 수 있다.
왜 우리는 불안하고 걱정 근심이 많고 원망 불평이 많은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의 풍화 같은 고난이 찾아올 때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한다. 그때 주님 안에 들어가 보호를 받으면 된다. 우리에게 주님의 장막이 있다. 시험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위대한 신앙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