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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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9 수요저녁예배 설교(약 2:1-7 /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윤성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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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10-09 21:19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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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eUz3nnTyEc8?si=H5pbtJhinH9SgKDg


신앙생활, 우리의 삶에 도전적인 말씀을 준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차별과 편애에 부딪히게 되어 있는데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지 배우게 되겠다. 


1.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1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차별은 불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헬라어로는 두단어가 합쳐진 말인데, 얼굴과 취하다는 말로 되어 있다. 개역한글 성경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고 했다. 차별에 대해서 요즘에는 편애라는 말을 많이 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고, 누군가는 덜 사랑하고, 누군가는 더 대접하고, 누군가는 덜 대접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차별하면 안되는가? 모든 사람은 차별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본문은 차별하지 말라고 한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 믿는 사람은 믿음에 의해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런데 믿음을 가졌다는 말 앞에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지극히 높으시고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영광스럽다는 말 속에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시는 신성과 그분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낮아지셔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높아지신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으로 하늘에 계신지 믿음으로 본다면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불공평하게 차별하지 않게 된다. 이런 믿음을 가졌기에 야고보가 우리에게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영광스러운 주님을 바라볼 때 그분을 바라봄을 통해 세상 화려한 것에 미혹받지 않는다. 세상에 아무리 가치 있고 귀중한 것이라도 그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주님이 가장 귀하고 존귀한 분이시고, 세상 모든 것은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발견한 후에 세상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제대로 만났다면, 제대로 발견했다면, 영광스러운 주님을 믿음으로 봤다면 가치관이 바뀐다. 세상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 않다. 주님을 마음에 품었다면 가장 귀한 보물을 간직했다고 여기고 만족하며 살 수 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

실제로 예수님이 본을 보이셔서 가나안 사람, 사마리아사 사람, 세리 등 죄인들과 어울리셨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판단하거나 평가하면 안된다. 


2. 차별에 대해 부자와 가난한 자를 예로 들음 2-4절

차별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예를 들어 말씀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들어서 교훈하고 있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많았고 그 당시에 흉년도 있었고 본국을 떠나 타지역에서 유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곳곳마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짓고 거기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이때만 해도 교회로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가정 집에서 모이는 경우가 많았고, 건물에 교회 이름을 붙인 것은 기록상 도마 교회인데, 3세기 중반에 세워졌다. 그때도 가정 집을 교회로 개조해서 예배당으로 만든 것이다. 

회당에서 예배 드리고 교제하는 가운데, 예를 들어서 가난한 자는 어떻고, 부자는 어떤가를 이야기한다.

먼저는 외모적으로 평가한다. 부자는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했다. 여기 나오는 인물은 남자이다. 당시에 부와 권세의 상징이 금으로 치장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는 남루한 옷을 입었다. 낡고 찢어진 옷이다. 당시에 가난한 자들은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 외적으로 보면 부자와 가난한 자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회당이라고 하는 교회에서 어떻게 대하는가? 부자에 대해서는 "눈여겨 보고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라고 말했다. 만약에 우리 교회에 유명한 사람이 오면 관심을 많이 가질 것이다. 정말 부자가 오면 좋은 자리로 안내할 것이다. 만약에 남루한 옷을 입고 온다고 하면 부담스러워 할 수 있고 무관심 할 수 있고 교회에 별로 덕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할 수 도 있다. 젊은 사람이 왔을 때와 나이 많은 사람이 왔을 때가 같지 않다. 누구에게나 다 이런 마음이 있다. 이것이 경제적 논리처럼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 안되는가? 별로 유익이 되지 않으면 무관심하게 된다. 

당시에는 아무나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당에는 지정석들이 있었다. 개신교 역사에 보면 돈을 내면 좋은 자리에 배석하던 때도 있었다. 부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좋은 자리로 안내한다. 

반면에 남루한 옷을 입고 온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한다. 거의 노예와 같이 취급한 것이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는 없을까?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이런 모습이 조금씩 있다.

여기에 대해서 "악한 생각"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했으면 우리는 어떻게든지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그것은 악한 생각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약 2:9)

이런 행위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외적인 것을 가지고 판단하면서 자신을 죄를 지었다면서 안타까워하는 자들이 별로 없다.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흘러가 버리고 만다. 가책이 없다. 이것을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신다. 5절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선택하셨다고 했다. 이것이 무조건 가난한 자를 선택하고 부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도 구약시대에도 이것을 강조했다.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다고 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가난한 자를 언급하는가? 가난한 자는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다. 돈이 없고 권세가 없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나에게 의지할 것이 없고 바라볼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환경과 처지를 주셨다면 어찌 보면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온전히 믿음이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는 기준을 잘 모르겠지만 오늘날 가난해도 먹지 못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나의 모든 환경을 만들어주셨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믿는 자들도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잘 살고 돈이 있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다니고, 삐까번쩍하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매일 갈급하고 눈물을 흘리는 환경이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고 했다.

가난은 실질적인 가난도 있지만 상징적인 가난도 있다. 가난한 자가 오직 돈을 사랑하고 출세만 원한다면 믿음이 부요케 될 수 없다. 돈이 있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사용한다면 믿음이 부요한 자이다. 믿음이 부요하게 하시려고 물질의 부족과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있다면 그 자체가 복이 될 수 있다. 단순하게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다고 믿음에 회의를 느끼면 안된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다. 지금도 경상북도 면적 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전쟁을 치루고 있고 중동 여러 나라들과 경쟁하고 있다. 중동에 엄청난 땅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몇십배 되는 나라들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을 없앨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찌 보면 쩔쩔 매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그 작은 나라를 일찍부터 선택하셨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비가 내리면 흡수해 버리는 박토였다. 그런 땅에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복을 주셔서 잘 살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부르짖으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작은 나라를 택하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결코 세상 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 환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더 믿고 찾으라는 뜻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면 믿음이 부요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늘나라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기뻐한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기쁨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가 웃으며 기뻐한다. 그런데 아이가 죽은 채로 태어났다면 웃을 자는 없다. 영원한 기쁨을 우리에게 보상으로 주실 것이다. 가난하다고 절대로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것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경제적인 것을 떠나 질병이 왔을 때에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찾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4. 너희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 6-7절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다. 일반적으로는 가난한 자는 멸시하고 부자는 존대한다. 성도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가난한 자를 업신 여기는 너희를 부자는 억압한다고 했다. 부요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을 비방한다. 부자들이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고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한다.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다 좋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 자들을 비방한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방법은 고리대금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큰 이자를 매겨서 갚지 못하면 모든 재산을 빼앗고 자녀도 빼앗고 본인도 노예가 되었다. 유대인들이 이런 일을 많이 했다. 법정으로 끌고 가서는 변호사를 사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재판을 끌고 간다. 이세벨이 작전을 짜서 돈을 주고 증인을 매수해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다. 부자들이 그런 일을 행하고 있다.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름이 뭔가? 예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이름을 갖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2)

부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비방한다.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비방할 수 있는 것일까? 믿노라 하면서 차별하고 편애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부요함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그의 이름을 경멸한다면 여기에 해당되는 죄를 짓는 것이다.

가난하다고 멸시하면 안된다. 왜 그것이 중요한가?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자이다. 그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주님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 14:31)

우리가 주님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잘 대해준다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영적으로 부요한 자리에 있어서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가운데 빠져서는 안되겠다.

어쨋든 우리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믿는 성도로서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고 이 말씀을 실천하는 우리가 다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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