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30 수요예배 설교(히브리서 5장 11절-6장 3절 /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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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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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swhz7DtufHo?feature=shared
바울은 히브리서 앞 부분에서 예수님이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했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대부분 유대교에서 율법을 많이 배운 자들이다.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율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자손이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 속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가? 유대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멜기세덱에 대해서 설명한다.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 아론 자손도 아닌에 구약시대 대제사장이었다. 모세가 율법을 받기 훨씬 전 아브라함 때부터 대제사장이었다. 예수님은 아론의 계열을 따라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의 계보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셨다.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히 5:11)
멜게세덱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멜기세덱에 대해서 설명을 해도 히브리서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멜기세덱이 누구인가?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18~19)
아브라함이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멜기세덱이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해주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고 제사장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었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이렇게 멜기세덱에 대해서 설명해주는데 이것을 히브리서 독자들이 다 이해하면 걱정하지 않을텐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히브리서 독자들이 아직 믿음이 어리고 듣는 것이 둔하다. 머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어려워서 이해를 잘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멜기세덱에 대해서 전하려고 하다가 다른 말씀을 삽입한다.
신앙이 장성해야 된다는 것이다. 믿음이 자라야 말씀을 깊이 깨닫고 어려운 것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깨닫는 것이 성장해야 믿음이 성장한다. 깨닫는 것이 자라나지 않으면 믿음이 성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 히브리서 독자들은 듣는 것이 둔하다.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였다.
바울은 이렇게 믿음이 어린 자들에게는 쉬운 것, 젖을 먹이려고 애를 썼다. 일부러 어려운 말씀을 가르쳐서 고민하게 만들지 않고 쉬운 것을 가르쳐서 잘 이해하고 따라올 수 있게 했다.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 3:1~2)
바울이 보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아직 육신에 속해 있었다. 신앙이 어렸다. 이들에게 자꾸 딱딱한 진리, 밥을 먹이려고 하면 이해하지 못하니까 쉬운 말씀, 젖을 먹인다고 했다.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고, 레위 지파 아론 자손도 아닌데 제사장이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느냐? 하면서 히브리서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것은 잠깐 멈춰두고, 먼저 믿음이 자라나야 할 것을 강조한다.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7장에서 다시 설명한다.
사도 베드로도 이에 대해서 말씀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성경을 읽어보면 말씀 가운데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교리, 신령한 내용이 있다. 그런 것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이 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놓아두고 나중에 믿음이 자라나면 이해할 때가 오게 된다.
12절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히브리서 독자들이 예수님을 믿은 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깊은 진리, 어려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하고 젖이나 먹어야 될 처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신앙이 어린 자와 장성한 자를 구분하는데, 먹는 것을 가지고 구분한다. 어린 아이는 젖을 먹어야 한다. 장성한 자는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어린 아이인지 장성한 자인지 구분 짓고 있다.
젖은 뭔가? 성경 말씀이기는 한데 초보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이기는 하다. 그러나 너무 어리다. 그래서 젖을 먹인다. 조금 성장하면 이유식을 먹인다. 조금 더 자라면 밥을 조금씩 먹인다. 더 자라면 고기를 먹인다. 그와 같이 해야 한다.
단단한 음식은 뭔가? 성경 말씀 중에 깊은 진리, 어려운 말씀,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소화시키기 어려운 내용이다.
13절
먹는 것을 가지고 어린 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분한다. 젖 먹는 자는 어린 아이이다. 장성한 자는 젖을 먹으면 이상한 것이다. 장성한 자는 밥을 먹어야 한다. 어린 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
어린 아이의 특징, 첫째는 듣는 것이 둔하고, 둘째는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셋째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
의의 말씀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그런데 경험하지 못했다고 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면 거기에서 경험이 생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지고,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경험이 생긴다. 그만큼 확신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난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고 순종하지 않으면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러면 믿음이 자라날 수 없다. 믿은지 오래 되었는데 왜 믿음이 자라나지 못했는가?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않으면 큰 걱정이다. 성도가 자라나려면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그만큼 확신이 생기고 심령이 자라나게 된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아직 장성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어려운 진리에 대해서 다 설명하지 않았다.
14절
장성한 자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 먹는 것이 다르다. 장성한 자에게 젖을 주면 어울리지 않는 것이고 그것을 먹고 힘을 쓰지 못한다. 장정이 젖을 먹고 무슨 힘을 쓰고 기운이 나겠는가? 밖에 나가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힘이 생기고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십자가를 가지고 젖으로 먹일 수 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려 죽으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가르치면 젖을 먹인 것이다. 이것도 큰 진리이고 귀한 진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단단한 음식을 먹게 하려면 조금 더 가르쳐야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라고 가르쳐야 단단한 음식을 먹이는 것이다. '자기 욕심과 고집을 다 버리고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자기의 옛사람이 죽어야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라갈 수 있다' 이렇게 가르쳐야 단단한 음식을 먹이는 것이다. 이제 처음 믿는 자에게 이런 말씀을 가르치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장성한 자가 되면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 그래야 믿음이 강해지고 능력의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다.
"지각을 사용함으로" 감정에 치우치고 형편과 상황에 따라 넘어지고 흔들리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 어린 아이들은 자꾸 넘어진다. 기분과 감정과 형편에 따라 쉽게 흔들리고 넘어진다. 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한다. 감정과 형편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심령의 감각, 영적 분별력이다. 무엇이 옳은 길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분별하고 그 길로 간다. 미혹을 받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다.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연단을 받아서 강해지고 선과 악을 분별한다. 보통 사람들은 선악을 어떻게 분별하나? 윤리적, 도덕적으로 분별한다. 착한 일을 하면 선하고 나쁜 일을 하면 악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악 분별은 윤리적, 도덕적 수준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이다. 내가 기준이 아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선이고 진리이다. 말씀을 지키면 선이고 어기면 악이다. 장성한 자는 선과 악을 분별한다. 믿음이 어린 자는 선과 악을 분별하지 않는다. 진리가 기준이다. 이런 몇가지 특징이 있다.
6장 1-3절은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라는 말씀이다.
1절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버리라고 했는데, 초보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의미이다. 기초에 머물러 있지 말고 거기서 자라나야 된다는 것이다. 건물의 기초를 놓으면 1층을 올리고, 2층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1층을 지었다가 부수고, 다시 지었다가 부수는 일을 반복하면 건물이 세워지겠는가?
그런데 신앙이 어린 자들이 이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 2절에 "터를 다시 닦지 말고"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가 무엇인가? 첫째,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불신자처럼 사는 것이 죽은 행실이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데 사는 것은 불신자와 똑같이 살면 안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이다.
셋째, 세례이다. 세례는 두가지이다. 불세례와 물세례이다. 믿는 자는 불세례, 성령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 증거로 물세례를 받는다.
넷째, 안수이다. 안수는 직분을 받을 때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안수를 받는다. 안수를 받았으면 자라나야 하는데,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되겠는가?
다섯째, 죽은 자의 부활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믿음의 기본이다.
여섯째, 영원한 심판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구속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기초를 배웠으면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성장하고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완전의 목표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 예수님을 닮아서 주님처럼 되면 그 사람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힘쓰고 노력해서 성장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힘쓰는 자를 도와주신다. 노력하면 그만큼 자라나게 된다.
우리가 믿은지 오래되었다. 수십년 믿었다. 그렇게 오래되었으면 진보하고 자라나야 한다. 세월만 많이 보내고 자라난 것이 없으면 참 안타까운 상태인 것이다.
나는 어떤 상태인지 점검해봐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진보를 이루기를 노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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