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6 수요예배 설교(히브리서 6장 4-12절 / 타락과 믿음의 권고, 윤성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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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 https://youtu.be/E4k55Tf7aUk?feature=shared
히브리서는 초기 히브리 사람들에게 편지한 내용이다. 믿음과 행위를 격려하기도 하고 경고하기도 하는 내용이다. 초대교회, 특별히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문제가 있었는데, 유대교, 율법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율법이 완성되고, 폐지되었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부분이 일정 초기 기독교에도 들어왔기에 이 문제로 항상 골치가 아팠다.
(본문 구성)
1. 타락하지 말아라(4-8)
2.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라(9-20)
구원관이 잘못되면 불안에 빠질 수 있다. 잘 믿으면 천국 가고 잘못 믿으면 지옥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구원에 대한 잘못된 관점 때문이다. 구원은 자기 스스로, 자기 행위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받는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내가 분명히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배교의 위험에서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서지 말라는 것이다. 정통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고,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 고 미혹할 때 초기 기독교인들이 흔들렸다. 절대 흔들리지 말고 배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4-6절
구원 받고, 중생한 자들이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외부적으로 약간의 체험을 할 수 있지만 빛을 비춤을 받고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고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다.
그런데 6절 첫 마디에 "타락한 자들은"이라고 시작한다. 앞에 믿는 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타락한 자를 말한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 6:6)
이런 자들이 구원 받을 수 있을까? 4-5절에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타락해서 구원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해석이 다르고, 신학적 관점으로 볼 것인가? 목회적 관점으로 볼 것인가?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논란이 될만한 문제이다. 어느 관점에서 봐야 되는가? 목회적 관점에서 봐야 이 문제가 풀린다. 신학적으로 풀면 4-5절과 6절은 연결시킬 수 없다. 지금도 보수적인 교회 안에서도 해석에 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타락"은 원어적으로 떨어져 나간다는 의미이다. 원래 이 말이 타락이라고만 해석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땀이 피 방울처럼 떨어졌다. 그때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면 회개가 불가능한가?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시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현실적으로 보면 믿는 사람이 실족한다. 교회를 다니다가 다른 종교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신앙을 떠나 이단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속단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없다. 6절을 보면 회개 불가능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목회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 19:24)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집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누구나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을 받아주신다. 구원, 회개는 하나님이 하시면 다 하실 수 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3)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고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이런 성구를 보면 한번 구원 받은 자는 다시금 정죄함이 없다. 구원 받은 사람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은 교리적, 성경적으로 맞지 않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 저주까지 했다. 그런 베드로가 회개를 했다.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62)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였지만 회개하면 하나님은 받아주신다.
마가 요한도 제 1차 전도여행 때 중간에 돌아오는 바람에 많은 손해를 끼쳤다. 그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졌다. 그런데 바울이 후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가 회개했기 때문에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다 용서하신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지만 다윗은 지옥에 가지 않았다. 그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큰 실수를 해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원하신 자는 그 구원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하나님이 능력이 무한하시고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하나님에게서 구원받은 자를 빼앗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해서 확실하게 보장해주신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37~40)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 구원하신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회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성령 훼방죄, 성령을 거스리는 죄이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이다.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죽을 때까지 복음을 거부하는 자이다.
7-8절
자주 비를 내려주시는데 채소가 나기도 하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기도 한다. 땅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믿음의 열매를 잘 맺는 사람이 있고, 말씀을 듣고도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하는 자도 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길가, 돌밭, 가시 엉겅퀴 밭, 옥토가 있는데, 옥토에 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가시 엉겅퀴는 세상 염려, 욕심 등이다. 이런 것에 다 빼앗겨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잘 자라고 예수님을 앙망하고 천성을 바라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욕심을 부리면서 산다. 믿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합당한 채소"를 내면 복을 받는다. 그런데 만약에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마지막에 불사름이 된다고 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1~15)
불 가운데 받는 구원이 있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라기 보다는 보상의 문제이다. 보상을 받는 열매를 맺히느냐? 보상이 하나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가? 이 편지를 받아 읽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 믿으면서도 주변의 환경을 받아 갈등을 겪고 있으니까 흔들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권면하는 말씀이다.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을 잘 지키지 않고, 불순종의 삶을 살면 책망하시고 벌을 내리신다.
9절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씀한다. 우리에게 잘못된 믿음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신념이다. 신념은 자기 스스로 만든 믿음이다. 이것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0% 이루어진다. 그런데 믿음과 신념을 혼동하는 자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수십일을 금식하고 재림에 대해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날과 시를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재림에 대해서 예고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비로운 현상이 있다. 꿈과 환상과 환청과 이적과 기사로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따라가면 안된다.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 13:1~3)
환경에 영향을 받는 신앙을 가지면 안된다(예; 최반석 교수 - 안식교, 기독교, 폐결핵).
뜨겁게 믿자고 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감정이다. 인격은 지, 정, 의인데, 첫번째가 지이다. 지식이 잘못되면 감정도 잘못될 수 있다. 지적으로 바르게 되어야 한다. 성경을 정확하고 똑바로 알아야 감정과 결정도 제대로 할 수 있다. 이단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지적으로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른 믿음은 말씀, 언약을 믿는 것이다. 성경,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 진리가 무엇인가! 무엇이 옳은 것인가! 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10절
하나님을 공평하시다. 열매를 맺는대로 보응하신다는 의미이다. 믿음을 잘 써서 말씀을 순종하면 거기에 맞는 보응을 해주신다. 행한대로 갚아주신다. 그런데 사람은 공평하지 못하다.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은 행위와 사랑으로 성도를 잘 섬기라는 것이다. 행위와 사랑으로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을 위해 힘쓰고 애쓴 것은 영원한 상급으로 주어지게 된다. 없어지지 않는다. 손해 보지 않는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11-12절
부지런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부지런함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이 부지런함의 목적은 소망의 풍성함을 깨닫는 것이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을 나타내는 본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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