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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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9 수요저녁예배 설교 (히브리서 11:23-40 / 믿음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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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11-29 21:40 조회4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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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n8UkxN1Eksk?feature=shared


23-25절

23절부터 모세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고 창성하는 것을 애굽의 바로가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가 보기에 "아름다운 아이"로 여겨졌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기 자녀를 아름답게 볼 것이지만 그런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모습이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행 7:20)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부모는 아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을 깨달아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 동안 숨겨 길렀다. 중요한 것은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다. 노예의 위치에서 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 발각되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을 각오를 하고 아이를 석달 동안 숨겨 길렀다. 

다니엘서 1장에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가 포로생활을 하는 중에 왕궁에 뽑혀가서 왕이 정해준 음식을 먹으며 바벨론 학문을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하고 그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것도 목숨을 걸고 한 일이었다. 왕의 노여움을 사면 단번에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믿음 지키기 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 10:28)

세상 왕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한다.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분은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석달 동안 모세를 숨겨 기르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상자를 만들고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나무에 모세를 담아서 나일강에 띄웠다. 마침 그때 바로의 딸 공주가 목욕하러 왔다가 갈상자를 발견하고 모세를 자기 아들로 삼는다. 모세의 모친은 유모로 뽑혀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믿음을 길렀다. 말씀을 가르쳐주고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준 것 같다. 이후에 모세가 장성해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길을 자처한 것을 보면 어머니에게 신앙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고 했는데, 단순히 호칭을 거절했다는 것이 아니고 부귀, 영광 등 모든 권세를 포기한 것이다. 공주의 아들은 육신적으로 최고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릴 수 있다. 한평생 편하게 즐기며 살 수 있다. 그런데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것을 거절했다.

오늘날은 죄를 지으면서도 돈만 벌면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 권세를 얻고자 하면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생기면 말씀과 믿음 다 포기하고 욕심을 부린다. 그런데 모세는 권세, 부귀, 영광을 다 포기하고, 장차 왕이 될 수 있는 자리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가 택한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이었다. 그것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권세와 바꾸었다. 고난, 멸시, 천대 받는 길로 가려고 결심하고 작정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다.

믿음은 어떤 것이 정말 가치있고 귀하고 따라가야 하는지를 분별하게 한다. 우리도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오늘날 모세와 같은 분별력을 가진 자들이 별로 없다. 욕심 때문에 믿음과 말씀을 포기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버린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다. 죄짓는 것이고, 방탕한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다. 잠시 그렇게 살다가 지옥에 가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더 가치있고 복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는 걸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주님이 함께 해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께서 은혜 주시고 함께 동행해주셨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4)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며 물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된다. 모세는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될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주님과 함께 사는 길, 주님 믿으며 따라가는 길을 가기 위해서 수모를 당해야 하는데,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애굽의 모든 보화는 거절하고 버렸다. 이같은 결단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며 살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부끄러운 모습이 많다. 주를 따라가기 위해서 무엇을 버렸는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수모 받는 것이 있는가? 믿음의 선진들은 굉장하다. 도무지 버릴 수 없는 것도 포기하고 고난 받는 길로 나아갔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다" 우리도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천국상급을 소망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나아가야 하겠다. 


27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애굽을 떠났는데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모세의 부모도 이런 미음을 가졌다. 모세도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독재자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당당하게 애굽을 떠났다. 그렇게 애굽을 나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참았다. 이것이 생명있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안보인다, 없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마음을 갖고 말씀을 순종하고 믿음을 지켰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결단 있는 믿음을 가졌다. 


28절

유월절 피 뿌리는 예식을 정했다.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날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므로 장자의 재앙을 피하고 출애굽의 은혜를 입었다. 


29절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마르게 하시고 마른 땅으로 바닷길을 건넜다.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으로 한 일이다. 하나하나 참 대단하고 목숨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믿음으로 이루어 놓았다. 


30절

여리고 성을 정복한 믿음이다. 광야 40년을 마치고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견고한 여리고 성이 앞 길을 막았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돌았고, 일곱째 날 일곱 바퀴를 돌고 크게 함성을 지르니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여리고 성은 굉장히 견고한 성이다. 이중으로 성곽을 쌓고, 성벽 위에 집을 지을 정도로 두꺼운 성벽을 가졌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서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하셨다. 


31절

여리고 성 사람들이 다 멸망 당할 때 기생 라합과 가족들만 살게 된다.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넘겨주신 것을 믿었고,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대적들을 물리치시는 것을 믿었다. 이스라엘 정탐꾼을 영접하면 하나님이 버리지 않고 구원해주실 것을 믿었다. 이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평안히 보내주었다. 이 일로 인해 여리고 성이 멸망 받을 때 기생 라합을 구원받게 된다. 


32-34절

이름만 언급하고 지나간 사람들이 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대군을 격파하는 기적을 행했다. 바락은 여선지자 드보라와 함께 가나안의 군대를 쳐서 이기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무찔렀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원수 암몬을 쳐서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다윗과 같은 용사도 이름 두 글자만 쓰고 지나갔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했고, 선한 왕으로 나라를 잘 통치한 위대한 왕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영적 잠을 자고 멸망 길로 갈 때 부흥 운동, 회개 운동을 일으켜서 민족을 살린 사사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간 애굽의 종살이를 했다. 믿음으로 바로를 이기고 해방을 맞았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했다. 다윗은 여러 나라와 족속들을 쳐서 물리치고 승리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해놓은 역사이다. 

"의를 행하기도 하고" 다윗은 공과 의를 행한 왕이다. 사무엘도 평생 깨끗하게 의롭게 살았다. 다니엘은 얼마나 정결하고 의롭게 살았는지 시기하는 사람들이 고소할 틈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 때 이처럼 의롭고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약속들을 받기도 하고" 성경에 많은 약속이 있다.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고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삼손은 사자의 입을 찢어 죽였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막아주셨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갔고, 다윗은 사울의 칼과 창의 위협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승리했다. 엘리야가 약해져 쓰러질 상황에 있었고, 히스기야도 병들어 죽을 위기에 있었는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했다. 


35절

사렛다 과부는 죽은 아들을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로 살려주므로 받았다. 수넴 여인도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 선지자가 기도함으로 살리심을 받았다.

믿음 지키다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은 것 같다.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다. 담대하게 고난을 받고 순교를 각오하면서 초연한 자세로 고난을 맞이했다. 참 놀라운 믿음이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그렇게 했다고 했다. 고난 받다가 죽으면 하늘나라에서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을 바라보며 고난을 받고 구차히 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천국의 상급을 확신한 것이다. 천국과 상급이 희미했으면 이렇게 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바라보고 믿은 것이다. 


36-37절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았다. 나봇과 예레미야, 스데반이 돌로 침을 받았다. 이사야는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

아히멜렉 제사장은 다윗에게 음식을 줬다고 고발 당하고 사울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당하고 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고난을 읽으면서 믿음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은 잘되기 위해서, 복받고, 은혜받고, 뭔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잘되기 원하는 마음으로 믿음생활을 한다. 그런데 고난 받은 자들은 믿음을 지키다가 다 잃어버렸다. 죽임을 당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학대와 시험을 당했다. 그럼에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믿음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했을까?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위대하고 놀라운 것이다. 믿음은 시시하지 않다. 조금 복이나 받는, 유익이나 좀 얻는 정도가 아니다. 목숨 걸고 믿어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세상 것을 다 잃고 목숨을 잃어도 믿음만은 잃어버리면 안된다.

돈을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돈 가지고 시험하면 다 넘어간다. 권력에 눈이 멀어 있는 사람은 권력 빼앗길까봐 모든 것을 다 포기한다. 그 시험을 하면 못 견디고 다 넘어간다.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죽인다고 하면 다 넘어간다. 그런데 돈을 초월한 사람은 돈 가지고 시험할 수 없다. 권력을 초월한 사람은 아무리 권력을 빼앗길 위협을 당해도 시험이 되지 않는다. 목숨을 초월한 사람은 죽이려고 하면 죽일테면 죽이라고 한다. 내가 아깝게 여기고 욕심 부리고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시험이 된다. 모든 것을 다 초월해버리면 시험이 되지 않는다.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오직 믿음 하나 붙들고 사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의 삶,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믿음생활이 너무 고상하고 위대해서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세상을 초월해서 사는 사람이다. 오직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믿음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광야, 산, 동굴을 유리하면서도 기쁨으로 믿음을 지킨다. 욕하고 원망하고 신세 타령하며 하나님을 저주하며 숨어 다니는 것이 아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천국에 소망을 두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너무 부유하고 평안하고 안일하다 보니 작은 것이 넘어진다. 시험 거리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넘어져서 교회를 가네 안가네, 예수님을 믿네 안믿네 그러고 있다. 우리가 자라나야 하겠다. 큰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39절

이들은 다 믿음을 지키다가 증거를 받았다. 그런데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약속된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오실 예수님을 멀리 바라보며 즐거워하면서 믿음생활을 했다. 


40절

우리로 하여금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시고 십자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승천하신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도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막연하게 바라보았는데, 우리는 오신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바라보고 누리며 살 수 있게 해주셨다. 주님으 십자가에 달려 구속 사역을 이루신 것이 없었다면 구약 절기 제사가 다 의미 없고 헛될 뻔 했는데 주님이 다 온전케 하시고 성취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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