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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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3 수요저녁예배 설교 (롬 6:1-11 /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 / 김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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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3-13 21:38 조회3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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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_SoUq6sxvMI?si=Z_BiKoqefnE2q-9u

  

우리는 지난 주에 "아담과 예수"라는 제목으로 로마서 512-21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인류의 조상이자 대표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의 대표가 되셔서 이뤄주신 구속으로 인해 모든 믿는 자가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된 것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모든 믿는 자의 대표되신 예수님의 구속이 어떻게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배우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의 대표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속한 모든 자가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을 적용받는다고 했는데,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되더라도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인데, 논리적으로 말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구속이 어떻게 나의 구속이 될 수 있는가 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믿는 자의 대표가 되시고,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는 대표되시는 예수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배운 성도님들 중에 예수님과의 연합 교리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은 안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된다!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 아는 이 내용에 대해서 다시 배웁니다. 한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말씀을 지식적으로 아는데 그치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이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말씀을 지식적으로 듣는 것의 예를 한가지 들어보겠습니다.뉴스에 한해동안 스쿨존에서 교통사고 발생건수가 85건에 달합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 말을 듣는 우리는 안타깝다..’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의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스쿨존에서 운전을 조심히 해야지..’ 정도의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뉴스를 보는 중에 갑자기 큰 아이가 집에 급하게 뛰어 들어와서 아빠! 엄마! 큰일 났어요. 동생이 지금 학교 앞에서 차에 치어서 앰불런스에 실려갔어요!” 라고 외칩니다.

이 말을 듣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 언제? 어디로 갔는데? 심장이 쿵쾅 거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큰 충격에 휩싸일 것입니다. 부모의 온 신경이 내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에 곤두서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씀의 제목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인데, 그게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입니다.

이 말씀을 나에게 이루어진, 내가 누리고 있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야 되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게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구나!”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이렇게 놀라운 은혜의 축복이구나!” “아 행복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고 내가 변화되고 내가 이 은혜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당시에 이런 의문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는 죄를 더 많이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되었냐면 520절 말씀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바울이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율법은 지켜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인식하게 하고,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더 큰 감사를 하게 된다는 의미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죄가 더하다"는 것은 죄를 많이 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해서 깨달은 만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깨달은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는 질문은 바울의 의도를 비꼬아서 조롱하는 투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공격하려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사해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을꺼야! 물론 하나님이 좋아하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는다고 했으니까 난 괜찮아..천국에서 상 조금 못받고 말지 ..하나님이 혼내시면 조금 혼나고 말지..하나님 이번 한번만 좀 봐주세요.. 이해해 주실꺼죠? 이번에 거짓말 한번만 할께요..이번에 한번만 십일조 빼먹을께요..이번에 한번만 교회 안나갈께요..이번에 한잔만 마실께요..

이 정도는 애교로 볼 수도 있고 더 심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예 아무렇게나 살아야겠다! 난 어짜피 구원받았으니까..한번뿐인 인생.. 내 마음대로 할래! 천국에서 면류관 안받아으면 어때? 어짜피 천국에 가는 것은 정해진거잖아~~

그런데 이의로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아이들은 이런 생각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이 내린 답이 무엇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강하게 외칩니다! 무슨 소리냐!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짓겠다고? 어짜피 구원받았으니까 죄를 계속 지어도 되는 거냐고? 안돼! 그럴 수 없느니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은혜를 더 얻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 된다는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해서 결혼도 안한 처녀가 부모 사랑에 대해서 알아보겠다고 아이를 가져도 되는 것입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부모 사랑을 알 수 있다고 해서 부모님을 빨리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바울이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찌 죄 가운데서 더 살 수 있냐는 말입니다.

죄는 누가 짓습니까? 사람은 살아있는한 죄를 짓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인류의 대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에 속한 부패성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일평생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죄를 그치는 날이 옵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죽으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생각도 못하고 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가 어떻게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의미가 정확히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을 죄를 지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옛사람이 죽었으니까 이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 듯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적으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평생 죄를 지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죄를 지었고 앞으로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요? 앞뒤 문맥을 고려하여 이해하기 위해서 521을 보겠습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을 했었습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과 몸을 지배하고 우리의 몸을 죄의 병기로 사용하여 마음껏 부려먹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마귀의 머리를 짓밟으시고 죄와 사망을 멸하시고 우리를 구원해내셨습니다. 죄의 왕국에서 종살이하던 자들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하시고 자기 소유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마귀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골로새서 113-14에 나와있습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죄가 우리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죄로 물든 욕망을 죄된 것으로 알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나쁜 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죄의 종노릇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해서 죄가 우리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죄가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고 때때로 죄에 굴복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가 우리에게 명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합니다.

 

3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것에 대해서 세례를 언급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고백한 자에게 교회가 그 믿음을 공적으로 인정해주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세례을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물은 깨끗하게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씻어 정결케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죄 씻음을 받았다는 표로 세례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믿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표하는 것이 세례식입니다.

그런데 3말씀에서 세례가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지는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세례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의식입니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예수님과 연합된 자세례를 받음으로서 그 연합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혼식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부로 새출발을 알리는 예식입니다.

결혼이 먼저가 아니고 사랑이 먼저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세례도 믿음이 먼저이고, 믿음으로 이미 예수님과 연합된 자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깨우쳐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지난 것을 세례를 받은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출애굽해서 비하히롯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들 홍해가 가로 막고 있었고 좌우로는 피할 길이 없었는데 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발을 내디딜 때가 진정으로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작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간 후홍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갈라졌던 바다가 다시 합쳐졌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고통과 어둠의 삶이었던 노예생활이 청산되었고 이제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만 남게 되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감으로써 이제 노예생활이 완전히 끝났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신분을 완전히 벗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마음이 여전히 애굽에 남아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불평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되어었습니까? 마음이 애굽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결국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애굽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가나안 땅에 대한 새 소망을 가진 자들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례가 가진 중요한 의미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제 죄에게 지배 당하고, 죄에게 굴복당할 수 밖에 없었던 죄의 노예 생활이 끝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합하여 죽은 것에 대해서 더 확실한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4절 상반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장사되었다는 말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장사를 지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죽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죽은 것 같은 사람절대로 장사 지내지 않습니다. 분명히 의식도 없고 도 못하고 전혀 움직이지 못해도 심장이 뛰고 있는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관 속에 넣을 때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죽은 상태, 몸 어디에도 살아있다는 생명의 흔적이 전혀 없는 사람만 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되었습니다.

왜 여기 장사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요?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호흡이 끊어지시고 확실하게 죽으신 것이 확인된 후에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무덤에 장사지내신 바 된 것과 같이 우리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습니다.

6을 자세히 보면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죄의 몸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몸이 죽은 것을 풀어서 설명하면서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옛사람이 죽음으로써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몸죄에 의해서 통제당하는 몸입니다. 죄가 우리 몸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상태죄의 몸입니다. 죄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도록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는 상태가 죄의 몸입니다. 그런데 이제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7절에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 안에 여전히 죄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더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조정하지 못합니다. 내 속의 죄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고 하지만 성도는 죄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것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성도의 정체성과 갈등을 일이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은 자를 짓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 라는 자기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왜 불신자가 죄를 짓지 않겠습니까? 불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그의 정체성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바뀌고, 새로운 나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왜 성도가 죄를 짓습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잊어버렸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옛사람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옛사람이 장사된 자들입니다.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거나 죽는 연습을 했거나 죽은 시늉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된 것완료된 것이고 종결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끊기고 장사 지내신 뒤 부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새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옛날의 자기가 완전히 장사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된 자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입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삶이 장사 지낸바 돼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심령이 새롭게 되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와 함께 장사지낸바 된 자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연합함으로 새로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4절 하반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자가 가져야 되는 중요한 특징"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연합한 자는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므로 영원히 죽지 않고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목적은 단지 우리의 영생과 부활이 아닙니다.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주님과 연합한 자로서 주님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 주님의 사랑과 헌신, 주님의 순종, 주님의 기도, 주님의 언행심사를 다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닮아나가야 합니다. 주님과 연합되었다면,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고,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었다면, 주님과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하나가 되는 주체주님이십니다. 주님과 내가 연합될 때 주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주님의 몸이 됩니다. 따라서 주님과 연합되었어도 동등된 위치가 아니라 머리 되시는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죽음으로 주님과 연합한 사람은 부활에 있어서도 주님과 연합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연합분리될 수 없는 연합입니다. 서로 다른 물체가 자기의 형체를 유지하면서 합쳐지는 것결합이라고 하고, 결합된 것은 분리될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여러 부품들이 조립되고 결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동차에서 각 부품들을 떼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연합이 아닙니다. 연합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물속설탕한스푼 넣는다면 시간이 지나서 설탕이 물에 녹아 없어져버립니다. 하지만 설탕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물에 녹은 설탕물이 어디를 가든지 따라가게 됩니다. 이컵에서 저컵으로 옮겨지고, 누군가 마시면 그 사람 몸속으로 같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며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연합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 영원히 하나되는 연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의 연합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8-9“[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줄을 믿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9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다시 죽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니 주님의 십자가로 모든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죽지 않으신 것을 보니 그 죄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망이 주님을 주장하지 못한 것을 보니까

그 사망이 주님과 연합한 나도 주장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주님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단번에 죽으셨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한번에 완벽하게 처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값완전히 지불하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충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모든 택한 자들의 죄를 전부 사하실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무죄한 사람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모든 택한 자들의 모든 죄를 완전히 상쇄시키기에 충분하고 오히려 차고 넘치기 때문예수님을 믿는 자를 전부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신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그분이 사시는 삶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이 완전한 속죄를 이루고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켰기에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만 이를 통해 구속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온 우주에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합하여 모든 죄를 사함받고 주님의 부활에 합하여 새생명을 살게 된 우리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주님과의 연합을 노래하는 찬양 가운데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어"라는 곡이 있습니다.

후렴 가사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나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님과 연합되었으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되었으면,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11절 끝에 보면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과 새생명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여겨야 합니다. 왜 여겨야 합니까? 죄에 대해서 죽은 상태, 더 이상 죄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상태는 일종의 특권이고 법적인 권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영원히 효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와 상관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수억원의 예금을 들어놓으셨는데, 이것을 가르쳐주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가정해봅시다. 지금 나의 상황은 몇달동안 월급이 지급되지 않아서 집세가 밀리고 카드값이 밀려서 여기저기 돈을 빌리고 다녀야 되는 상황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주신 수억원의 돈이 있지만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면, 그 돈을 찾아서 쓰지 않으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런데 사용하지 않으면 삶속에서 실현될 수가 없고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특권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엄청난 특권을 받았으면서도 누리지 못한 예가 있습니다. 160년 전, 18629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노예로 지내온 많은 노인 노예들은 자신의 신분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노예제사라졌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선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길에서 옛날 주인을 만날까봐 몸이 벌벌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자신이 다시 노예로 팔리는 것은 아닌지 미심쩍어 했습니다.

우리도 더이상 법적으로 노예가 아닌데 경험적으로 여전히 죄와 마귀와 세상의 노예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죄에 빠진다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있는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죄를 짓고 조금의 갈등도 없이 옛날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그의 옛사람결코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더 죄짓게 만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더 경건하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12-14“[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을 알고 감사하는 자더욱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갈망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자로서 주와 같이 죽고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찬양하면서 주의 영광을 위해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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