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6 주일오전예배 설교 (욘 4:1-4 / 요나의 근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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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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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MuOmXfFtzjw?si=zgKHCWoLPNa7XqXr
‘요나’ 이야기는 언뜻 보면 재미있으나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내면과 영적 갈등을 보여주는 깊은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비둘기는 온순하고 순결한 새이며,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데 사용됩니다. 요나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름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이면서도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는 도망칩니다.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싫어하고, 멸망할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는 성을 냅니다. 참 순종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끝까지 고집하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요나는 자기 고집을 절대 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는 바뀌지 않습니다. 요나는 왜 이럴까요?
1. 도망치는 요나
요나서 1: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주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가기를 거부합니다. 요나서 1:3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요나는 하나님 얼굴을 피하려고 도망칩니다. 배를 타고 도망가면서 배 밑층에 내려가 잠을 잡니다. 가능하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잠을 잤습니다.
그는 왜 하나님 말씀대로 가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자신의 편견 때문입니다. 오랜 고정관념과 편협한 선민의식 때문입니다. 니느웨가 누구입니까?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그들의 이스라엘의 원수이고 이방 나라입니다. 요나의 생각 속에는 그들은 망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망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뭐라 하시든 내 생각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내 생각과 같아야 ‘아멘’ 합니다. 우리는 언제 은혜받습니까? 말씀이 내 생각과 같을 때 은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내 생각과 다르면 속으로 거부합니다. 듣기 싫어합니다. 들어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뭐라 하든지 내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2. 바다에 던져지는 요나
이런 요나를 하나님이 쫓아가십니다. 하나님께서 큰바람을 바다에 불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즉시 풍랑이 그치고 바다는 잠잠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큰 물고기를 준비했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3일을 지냅니다. 물고기 배속은 얼마나 깜깜하고, 뜨겁고, 답답하고, 냄새나는 곳입니까? 허리도 펴지 못하고, 다리도 펴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고, 죽을 고통을 당했을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잘못을 돌이키며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요나서 2:9에 보면 기도하면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요나가 무슨 서원을 했을까요? 아마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앞으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이런 서원을 했을 것입니다. 그 서원을 갚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했습니다(요나서 2:10). 요나는 죽음의 자리에서 살았습니다. 지옥 같은 곳에서 건짐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요나서 3:2에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니느웨로 간 요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는 즉시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명을 피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두말없이 순종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외쳤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회개한 것입니다. 그들은 핑계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조건 엎드려 자기들이 지은 죄를 회개했습니다. 백성들에게서 시작된 회개 운동은 왕에게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왕도 회개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요나서 3:10에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을 보셨습니다.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당연히 기뻐해야 할 요나는 기뻐하기는커녕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시고 물고기 배속에서 건져주실 때는 기뻐하고 감사하다가 다른 사람이 용서받고 은혜받으니까 ‘이건 아니다.’ ‘하나님이 정의롭지 못하다’ 하면서 화를 냅니다. 우리도 그럽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그냥 모르고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용서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릅니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잘못이 드러나기 원하고 처벌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 화를 냅니다.
4. 죽지 않는 요나
요나서 4:1에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나타나고, 큰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화 받는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요나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냈습니다. 요나는 언뜻 보기에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선지자이고, 말씀도 많이 알고, 하나님과 대화도 하고, 기도에 응답도 받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진짜 모습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성을 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화를 냈습니다. 참 충격적입니다. 요나 속에는 해결이 안 된 자아가 있습니다. 자신이 죽지 않은 사람입니다.
4장 2절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것을 보면 요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요나는 그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 거역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전에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의 불순종을 정당화시키며 하나님을 향해 따집니다. 얼마나 싫었으면 하나님을 향해 성을 냅니까? 이것은 요나의 참모습입니다.
2절 중간에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자기에게 주셔야지 왜 원수에게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유대인만 선택했고, 유대인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선민의식, 유대인 우월주의,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이 용서받고, 은혜받고,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죽었으면 죽었지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대로 성을 내는 것입니다.
요나서 4:3에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자기 뜻대로 안 되었다고 죽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8절에도 9절에도 죽여 달라는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바꾸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원망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하면서 하나님보고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 그의 가치관, 그의 고정관념, 그의 편견은 강하게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바닷속에 들어가도 죽지 않고,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도 죽지 않습니다. 참 죽기 힘듭니다. 요나는 끝까지 바뀌지 않은 채 요나서가 끝납니다.
내가 죽어야 내가 바뀝니다. 요한복음 12:24에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습니다. 죽어야 다시 살아나고 죽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뜻과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고난도 받아들이고, 죽음도 받아들이고, 저주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하며 자기가 죽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서 신을 벗었습니다. 자기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죽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집이 세고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와 다르면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그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변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매일 죽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육체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랫동안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 하지만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 생각은 고집불통이고, 내 주장을 결코 포기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바뀌기를 기다리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근본 문제는 자기 자신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고도 자기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나를 죽이십시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이 원하신다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내가 죽기를 결심합시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면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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