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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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5 수요저녁예배 (롬 9:1-18 / 하나님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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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5-15 21:22 조회3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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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85nHIV4bnqc?si=u6FvTyCuH-lXPo41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바울로 인해 많은 이들이 복음을 믿고 여러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런데 바울의 마음 한편에 근심과 마음의 고통이 있었다.  


1-3절

바울의 마음이 그치지 않는 고통, 큰 근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동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자기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저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형제와 친척과 동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이고 형벌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 바울이 골육친척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지옥에 떨어진다. 그런데 동족 가운데 불신자가 많은 것을 근심하고 속상해하고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참 놀라운 일이다. 바울은 복음 전하면서 동족에게 쉬지 않고 박해를 받았다. 바울을 방해하고 죽이려고 한 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 돌로 치고 태장을 치고 옥에 가둔 사람들이 다 유대인들이다. 바울이 가는데 마다 따라다니면서 전도를 방해한 자들일 유대인들이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면 미운 마음이 들 수 밖에 없다.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도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가족과 친지 중에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근심하며 안타까워 하는 마음으로 부르짖어야 한다. 


4-5절

이스라엘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들, 양자됨의 은혜가 있다. 어떤 민족에게도 주지 않은 특별한 은혜이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만나주시고 같이 해주신 것이 영광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의 증거로 할례를 받게 하셨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이 직접 기록한 말씀을 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뿐이다.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에게만 이런 은혜를 주셨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고 은혜와 복을 받는 수단이고, 특권 중에 특권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성경에 수천가지 약속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약속을 받았다. 가장 큰 약속은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것과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인데 다 이루어주셨다.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이 많다. 진정한 복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한민족을 통해서 나셨다면 얼마나 영광이겠는가! 예수님이 우리 가문에서 나셨다면 얼마나 복이겠는가! 이렇게 많은 은혜와 특권을 이스라엘이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큰 은혜요 복인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믿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선민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자기들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 예배와 말씀이 복이다. 예수님을 믿고 이 복을 누렸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데 이 복을 스스로 차버렸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폐기되었는가? 


6-13절

바울은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믿지 않았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자손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말씀해 놓고 이루지 못하시는 법이 없다. 

유대인들이 다 예수님을 배쳑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환영하고 믿은 자들이 있다. 끝까지 믿지 않은 자도 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 예수님의 열두 제자, 바울, 초대교회 교인들이 거의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이 전부가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다. 일부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복된 길을 걸어갔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반대하고 거절했다. 이렇게 둘로 나눠진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전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고,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인데 유대인 안에 육신의 자녀가 있고, 약속의 자녀가 있다. 육신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없이, 믿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예정으로 택함받은 은혜 가운데 태어난 자들이다.

두가지 예를 든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에서 부름을 받고 가나안을 향해 간다. 부름 받을 때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없었다. 하나님이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세월이 지나도 자녀가 생기지 않자 걱정이 되서 사라가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줘서 아들을 낳게 한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는다.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는 하다. 첩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이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이삭을 낳게 해주셨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녀이지만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이고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해서 임신을 했는데 쌍둥이를 임신해서 낳았다. 큰 아들은 에서이고 둘째는 야곱이다. 하나님이 야곱은 선택하고 에서는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에서는 육신의 자녀, 야곱은 약속의 자녀이다. 

인간적으로 이스마엘은 택하지 않고 이삭은 택했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이스마엘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브가를 통해 쌍둥이가 나왔는데 에서는 택하지 않고 이삭은 택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약간 이해가 잘 안된다. 인간적으로는 에서가 야곱보다 나은 점이 훨씬 많다. 야곱은 꾀보이고 욕심이 많다. 에서는 인간적으로 괜찮은 점이 많다. 그런데도 야곱은 선택하시고 에서는 선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달려있는 일이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없다. 우리는 야곱보다 더한 사람들이다. 욕심이 많고 꾀가 많고 죄를 많이 지었다. 그런데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해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태어나기 전에 선택하셨다고 말씀했다.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행위를 보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아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주권과 뜻으로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는 선택하지 않으셨다.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 절대주권으로 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이 애통하며 근심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10-13절의 내용을 다시 보면 선택과 예정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사람이 태어나게 전부터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서 구원할 자를 예정하셨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 진노의 그릇을 예정하시고 그런 사람도 내셨다. 선택이 예정되었다면 선택받지 못한 것도 예정된 것이다. 천국가는 것이 예정되었다면 천국가지 못하는 것도 예정된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9장의 중요한 교리이다. 선택(예정) 교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항의한다. 


14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이삭을 선택하시고 이스마엘은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야곱은 선택하고, 에서는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불의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드실 수 있다.

한 부자가 고아원에 가서 한 자녀를 택해서 양자로 삼았다. 이 아이는 부자집에 아들로서 행복하게 살다가 큰 유산을 상속받았다.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뀌었다.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 부자가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택함 받은 사람은 감사할 뿐이고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은 부러워 할 뿐인지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다.

불의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씀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잉태할 때 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하나님이 그들 중에 몇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이다. 택함받지 못한 자는 유기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이다. 


15-16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겨서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반대로 바로 왕은 진노하셔서 벌하셨다. 왜 이스라엘은 구원하시고 바로는 벌하셨는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의지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더 특별한 말씀을 하신다. 


17-18절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게 하셨다. 모세를 통해 내 백성을 보내라고 했을 때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보내지 않았다. 하나님이 열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벌하시므로 온 땅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이 바로를 그렇게 이용하셨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이 또 강퍅해져서 이스라엘을 추격해서 홍해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건너게 하시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수장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바로의 선한 마음을 바꾸어서 악한 마음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바로는 원래 강퍅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고집 센 마음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마음을 바꿔주시지 않고 그대로 두셨다. 이것이 완악하게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버려두셨다고 했다. 유기하셔다는 것이다.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사랑하시고 구원하시지만 택하지 않은 자들은 버려두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전혀 아니다. 

이 말씀을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자들은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고 망하고 만다. 예정과 선택 교리를 배우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택함 받은 백성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생명길로 간다. 택함 받은 백성은 큰 기쁨과 감격이 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 와도 환난이 와도 낙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구원이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내 힘과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내 행위에 구원이 달려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해서 구원하신다. 이 구원은 취소되지 않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다. 한번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된다. 다시 구원을 잃어버려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 내가 구원받았을까? 선택받았을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믿어지는지 보면 된다. 믿어지지 않으면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통해서 선택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지 다시 배웠다. 이 은혜를 감사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힘있게 믿음생활을 잘 해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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