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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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8 주일오전예배 설교 (아 5:2-8 / 잠자던 여인의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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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4-28 13:46 조회3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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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fTgNN0Ev7Bk?si=iSEiM8gqdCBZc8wH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 예루살렘 여인들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술람미 여인은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가 침궁에까지 들어가서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참 성도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으나 멀찍이 따르면서 세상 것을 더 좋아하고 자기 유익을 따라가면서 믿는 타락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본문은 술람미 여인이 신앙의 잠을 자다가 깨어나서 후회하는 내용입니다. 


1. 술람미 여인이 잠이 듦

2절에 “내가 잘지라도” 술람미 여인이 잠을 자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자는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교통하는 믿음이 좋은 신자였으나 잠깐 신앙의 잠이 들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 좋은 성도도 때때로 신앙의 잠이 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를 행하고 방주를 만들어 홍수 심판 때 구원받은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은 몸으로 잠을 자다가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바쳤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 자 애굽으로 내려가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다가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이 무서워서 광야로 도망치고,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모두 신앙의 잠이 든 때입니다.

3절에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옷을 벗었다는 말의 영적인 의미는 믿음의 옷을 벗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옷을 다 벗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자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를 단장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신발을 다 벗고, 발을 씻고, 마음 놓고 편안히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일을 다 중단하고, 봉사도, 전도도, 섬김도, 다 그만두고 잠을 자는 모습입니다. 다시 발에 먼지 묻히기 싫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핑계하면서 일하지 않으려고 꾀를 부리고 있습니다. 잠자는 자에게는 이상한 고집이 있습니다. 누구 말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깨우는 것도 싫어하고, 다시 옷 입는 것을 귀찮아하고 있습니다. 안일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5절에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이것은 손에 귀한 향품을 바르고 손가락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도록 사치하고 방탕하면서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향락과 방탕에 빠져서 죄짓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지만 술람미 여인은 옷 다 벗고, 발 씻고, 몸에 향수 뿌리고, 쾌락과 방탕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은 인생을 좀 즐기다가 나중에 예수님 잘 믿겠다는 것입니다. 돈 벌어놓고, 내가 하고 싶은 것 좀 하고, 세상의 재미 좀 보고, 다음에 믿음 생활하겠다는 것입니다.

2절에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이것을 보면 아주 깊은 잠을 자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은 깨어 있습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안 하고 잠을 자면서도 마음은 깨어 있어서 사랑하는 주님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문 두드리는 소리, 성령의 감동을 느끼면서 잡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러다가 혹시 하나님께 매 맞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믿음 생활 잘해야 하는데...’ 하면서 잡니다. 말로는 다 안다고 말합니다. 다음에 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좀 자게 가만두라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갈등하면서 잡니다. 혹 우리 중에 이렇게 신앙의 잠을 자는 분 안 계십니까? 


2. 주님이 찾아와 문을 두드림

2절에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여기 문은 마음의 문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고 양심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가책을 느끼게 만들고, 회개하게 만들고, 일어나게 만드십니다. ‘일어나 봉사해라, 믿는 일 해라, 전도해라, 게으름을 회개하고 방탕 생활을 청산하고 일어나라’고 감동을 주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아, 나의 비둘기, 나의 순전한 자야”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밤새도록 부르고 문을 두드리는데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고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습니다. 우리 주님 얼마나 춥고 피곤하겠습니까?

4절에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주님께서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감동과 은혜로 술람미 여인을 깨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손, 그 피 묻은 손을 쑥 들이밀 때, 술람미 여인은 깜짝 놀라서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들이민 손을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손입니다. 외면할 수 없고, 거절할 수 없는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이런 큰 은혜를 주시면 너무나 황송하고 죄송해서 벌떡 일어나서 믿는 일에 힘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붙들려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릴 때 제자들이 다 도망쳤습니다. 그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책망은 한마디도 안 하시고 은혜 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사랑의 손을 들이민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주님이 고난받을 때 도망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베드로가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셔서 생선과 떡을 먹게 해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손을 들이민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징계의 손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잠을 자면서 ‘내가 이러다가 큰 벌을 받지’ 하고 있을 때, 정말로 큰 징계가 와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만들어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징계도 사실은 사랑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셔서 바로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손을 들이밀 때 사랑의 손을 들이밀지, 아니면 징계의 손을 들이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손이 들어올 때는 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핑계하고 자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일어났습니다. 


3. 문을 열었을 때 주님은 이미 떠남

6절에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술람미 여인이 일어나 문을 열었으나 주님은 이미 물러가고 안 계셨습니다. 신앙의 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금방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속고 있습니다. 자기는 믿음 없이 살다가도 금방 돌아서면 예수님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찾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신앙이 내려간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합니다. 타락한 만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멀리 떠난 것만큼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믿음이 내려가기는 쉽지만 올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주님을 다시 찾으려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입니다. 6절 끝에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주님을 만나는 것도 때가 있고 기회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실 때, 은혜 주려고 하실 때는 만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멀리 떠나면 만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보면 신앙생활을 쉽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힘들고 어렵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기는 믿으면서도 주님 만나지 못하고 기도 응답을 못 받고 은혜 생활을 못 합니다. 기회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6절에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자책입니다. “내가 미쳤었나 봐, 내가 정신이 나갔나 봐” 이렇게 스스로 뉘우치고 후회하는 말입니다. 전에 주님이 찾아와서 문 두드릴 때 얼른 일어나서 문 열어드리고 주님을 모셔 들였어야 했는데 왜 내가 그때 문을 안 열어드리고 핑계만 대고 있었는지...., 이제 생각해 보니까 그때 자기가 정신이 나갔었다고 후회합니다. 신앙의 잠을 자는 사람들은 깨어난 다음 반드시 후회합니다.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후회합니다. 잠잘 때는 모릅니다. 핑계 대고 변명하고 지낼 때는 모릅니다. 일어나서 정신 차린 다음에 후회합니다. 


4. 주님을 사랑하므로 병이 남

주님을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지만 술람미 여인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7절에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여기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밤에 자지 않고 지키는 파수꾼을 말합니다. 오늘날 경찰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을 지키는 자들이므로 주민을 잘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술람미 여인을 만나서 때리고 상처 주고 겉옷을 빼앗아 갔습니다. 잘못된 파수꾼입니다. 

오늘날도 가끔 이런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려고 하다가 이단을 만나면 이처럼 손해만 보고 다 빼앗깁니다. 기도원에 갔다가 상처받고, 부흥회에 쫓아다니다가 상처받고, 심지어는 교회에 나와서 상처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잘못된 순찰자를 만나서 큰 상처를 입고 손해를 보았습니다. 옷도 다 빼앗기고 큰 손해를 보았으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다시 일어나서 힘을 썼습니다. 잃어버린 주님을 다시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나갔습니다. 순찰하는 자들이 상처를 주었지만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8절에 보면 술람미 여인은 주님을 사랑하므로 병이 났습니다. 이 사랑이 모든 난관 모든 시험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어디서 주님을 만났습니까? 아가 6:2에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주님은 자기 동산에 계십니다. 이 동산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양 떼를 먹이고 계셨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그곳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도 혹 주님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찾아야 합니다. 만날 때까지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처음 신앙, 잃어버린 처음 사랑, 되찾아야 합니다. 술람미 여인처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잠을 자지 말고 항상 깨어서 주님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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