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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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1 수요예배 설교(요한복음 19장 1-16절/예수님이 고난 당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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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04-01 21:26 조회1,8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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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 https://youtu.be/RqBWGNzGRnk



예수님이 붙들려가셔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또 헤롯왕과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차례 심문을 했지만 예수님에게 죄 없음이 밝혀졌다. 특별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세번이나 밝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했다. 중한 죄인을 다루듯이 매로 때린 것이다(1절). 당시 채찍질은 회초리질 하는 정도가 아니고 가죽끈에 쇳조각이 붙어 있어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큰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했다. 가시로 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혔다. 왕관과 왕복을 입힌 것이다. 그리고 앞에 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조롱했다. 가시관을 머리에 썼으니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둘려싸여서 조롱 받고 놀림감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딜수 없는 아픔이며 고통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면서 구경거리로 삼는다(4,5절). 참으로 비인간적이고 악한 모습이다. 죄 없는 줄로 분명히 알았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다루는지 이해할수 없는 모습이다. 마태복음 27장에는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때렸다고 했다. 평생 살면서 얼굴에 침뱉음 당한 사람이 별로 없다. 뺨 맞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런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형언할수 없는 수치와 고통과 멸시천대를 당하셨다. 죄없는 예수님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셨을까? 빌라도가 잘못된 재판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받으신 것이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내 죄때문에, 나 때문에 주님이 이런 고난과 멸시천대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없음을 알고 풀어주려고 노력하지만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딛혀 포기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다. 빌라도는 군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게 하고 홍포를 입히고 희롱하며 놀린 다음, 예수님을 데리고 나와서 죄가 없다고 말을 했다. 빌라도의 의도는 이정도로 조롱하고 때렸으니 놓아주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고 유대인들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고 악에 굴복하는 처사이다. 6절에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소리를 질렀다. 빌라도는 너희들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다. 7절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자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했다. 9절에 다시 한번 예수님을 심문한다. 이번에도 사형할만한 죄를 찾지 못한다. 12절에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조금 힘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그만둔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주고 만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나? 다수의 유대인들의 항의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니 거기에 굴복하고 지고 만 것이다. 빌라도의 처신을 보면서 깨달아야 한다. 옳은 일을 힘쓰다가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이 죄없다는 것을 알고 풀어주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조금 노력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세상에는 이런 경우가 많다. 우리도 믿음 생활 할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 말씀을 지키고 나아가야지만 승리할수 있는 것이다. 빌라도가 이렇게 된 것은 군중들의 항의 때문이었다(6절, 12절, 15절). 빌라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큰 소리에 기가 질려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모하고 소리지르면 정의와 법이 무시되고 다수에 굴복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 소리만 크게 지르면 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다수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는 다수가 옳은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 말씀에 옳은대로 행해야 한다. 다수가 불의를 따르면 실패할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함정이다. 소수의 사람이라도 믿음을 지키고 의를 세우고 정의를 붙들어야 하는데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12절에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빌라도를 협박했다.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니, 예수님을 풀어주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 빌라도가 어떻게 해볼수가 없게 되어 굴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고 말았다(16절). 마가복음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것이다. 예수님의 무죄를 알았으면서도, 예수님을 풀어주려는 생각을 했었으면서도 끝내 의를 세우지 못하고 바르게 판결하지 못하고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을 선고했다. 빌라도가 염두한 것은 진리냐 거짓이냐고 아니고 예수님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생각이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다. 총독의 자리를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빌라도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판단이었다. 빌라도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원했던 것처럼 죽을때까지 총독으로 잘 지냈을까? 그로부터 몇년후 로마황제로부터 파면을 당하고 갈리굴라 황제때 자살했다는 기록이 있다(요세푸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두고두고 저주의 사람으로 불려지고 있다.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이 되었는가. 가룟유다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가룟유다가 돈 몇푼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놓고서는 그 돈 쓰지 못하고 돈 던지고 목매달아 죽는 자가 되었다. 만약 빌라도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군중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올바르게 판결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유대인들은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였을 것이다. 무슨 방법으로든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이후의 일은 정확히 알수는 없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성경과 사도신경에 죄인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빌라도는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두고두고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역사에 남는 죄인이 되었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이런 빌라도와 비교해서 사도바울을 살펴봐야겠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나님 뜻 어기고 진리 어기고 잘못된 길로 가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느라고 고난을 많이 당하고 배척 당하고 굶기도 많이 하고 죽을뻔한 위기도 많이 당했다. 그런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바울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 위하고 하나님만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래서 존경받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살면서 빌라도처럼 살것인가 바울처럼 살것인가 결정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고 그 길로 가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길, 진리의 길로 가야 하겠다. 10절에 빌라도는 자기에게 큰 권한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사실이다.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고 풀어줄 권한도 있었다. 총독이니 이런 권세가 있었다. 침묵하시던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권한을 주신 것이다. 빌라도가 총독이 된 것은 인간적으로 능력과 지혜와 세상경험이 많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빌라도는 가장 중요한 것을 몰랐다. 그 권한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세상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다. 돈, 지식, 권세 등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겸손하게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수 있는 것이다. 빌라도는 총독이라는 큰 권한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주신줄 모르고 잘못 사용했다. 그래서 자리 빼앗기고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큰 벌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내게 주신 모든 것, 시간, 물질, 재능, 건강 등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이들은 구체적으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고 넓게 말하면 유대인들이다. 빌라도의 죄가 크지만 유대인들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15절에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소리 질렀다. 마태복음 27:24-25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자신은 무죄하다고 말하니 유대인들은 그 피를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손에게 돌리라고 말한다. 결국 이 말대로 죄값으로 인해 큰 고난을 당하게 된다. 2천년간 나라 잃고 유리 방황하고 2차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60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한다. 13절에 빌라도가 마지막 판결을 하기 위해서 재판석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 자리가 중요한 자리이다. 만약 이 자리에서 예수님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풀어주면 빌라도는 불의를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이다. 빌라도가 재판석에서 예수님을 판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판결한 것이다. 예수님에게 불의한 재판을 함으로 자신이 죄를 짓고 저주를 받고 영원한 죄인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어셨지만 예수님을 죽게한 빌라도는 큰 죄를 짓고 말았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사함받고 의롭다 인정받고 천국백성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큰 은혜와 구속의 사랑을 잊지말고 감사하며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하겠다. 빌라도처럼 어리석은 길로 가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 결정 하나가 결국 자기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빌라도 자신의 판결로 결국 자신을 죽인 것이다. 영원한 저주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결정 하나가 남에게도 영향을 끼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의 삶에, 인생에 돌아오게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구속사역을 완성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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