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8 수요저녁예배 설교(사 1:10-20 / 회개와 순종)(윤성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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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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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LaYoFafgO6c?si=pp7POgW6E99Jpqnu
서론: 우리의 예배, 과연 기쁨이 되고 있는가?
우리는 매주, 혹은 매일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 드립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예배인지, 아니면 혹시 겉으로만 번듯하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는 아닌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1장 10절부터 20절은,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유다)의 죄를 강력히 지적하시며 그들의 예배가 왜 형식적이고 위선적이었는지를 낱낱이 드러내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라고 부르실 정도로 심각하게 그 죄성을 폭로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향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네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내가 눈과 같이 희게 하리라!”라는 은혜의 초청도 잊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을 함께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 형식적인 예배를 거부하시는 하나님 (사 1:10-15)
1)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된 유다의 죄(1:10)
먼저 1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 더 나아가 지도자들을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구약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으로 극도로 타락하고 폭력적이며, 약자나 낯선 이를 학대하며 불공정한 재판과 불의를 행하던 도시였습니다(창 19:4-5). 그 도시들의 최후는 하나님의 심판(불과 유황)으로 멸망에 이르렀습니다(창 19:24).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가리켜 “너희도 소돔과 고모라와 다르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외적인 종교 생활과 실제 삶이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음을 꼬집는 말씀입니다.
•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왜곡하고(사 1:23),
•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렘 23:14),
• 약자들을 돌보지 않고 학대했습니다(겔 16:49).
2) 무수한 제물과 형식적 제사를 거부하심(1:11-13)
11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11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1)
고대 이스라엘에서 “짐승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죄사함의 방편이며, 감사와 헌신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수한 제물’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자동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왜냐하면 그들이 외적으로는 풍성한 제사를 드렸지만, 내면의 진실한 회개와 순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 즉, 이들은 “하나님 앞에 나왔지만” 실제로는 그저 종교 의식을 치르러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수준이었다는 뜻입니다.
• ‘마당만 밟는다’는 표현은, 예배의 실질적 내용 없이, 겉치레만 반복하는 모습입니다.
13절에 보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은 형식만 있고, 진실한 마음 없는 예배를 “가증하다”고 하십니다.
• 마치, 누가 내게 선물을 해 주는데 속으론 나를 무시하고 미워하면서 겉만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선물을 준다면, 그것을 받고 과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의 ‘마음과 삶’이 곧 예배의 핵심이라고 하십니다(삼상 15:22 참조). 예물을 드리는 행위 자체보다, 그 예물을 드리는 사람의 ‘회개와 순종’이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길 원하시는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와 순종입니다(삼상 15:22).
3) 절기와 모임도 가증하게 여기심(13-14)
이사야 1장 13절 하반부~14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무거운 선언이 이어집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구약 시대의 월삭, 안식일, 대회(성회) 등은 모두 하나님을 기념하고, 공동체가 거룩함을 회복하며, 감사하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 “가증하다, 싫다,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절기를 지키면서도 “악을 행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이처럼 죄와 회개라는 핵심이 빠진 채, 절기만 철저히 지키면 의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외적인 율법 준수를 강조하면서, 정작 내면의 위선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냈습니다(마 23장).
하나님이 예배(절기, 예물) 자체를 싫어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채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무겁고 역겨운 짐처럼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형제와 화목해야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니다.
4) 죄악된 삶이 기도를 가로막음(15)
15절은 예배뿐 아니라 기도마저도 막히게 만드는 죄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 말씀은 기도의 ‘양’과 ‘열심’만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간절하고,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한다 해도, 손에 피가 가득한 상태—즉 불의를 행하며 회개하지 않는 상태라면,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너희가 손을 펼 때…”: 이는 당대 유대인의 기도 자세, 곧 손을 들거나 펼치고 드리는 열정적인 기도를 의미합니다.
• “많이 기도할지라도…”: 기도의 분량이나 시간 자체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하십니다.
• 이것은 ‘불의를 행하고,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 겉으로는 간절해 보이고 열심이 있어 보여도, 실상 이웃을 해치고 약자를 짓밟으며 전혀 뉘우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외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참된 예배로 초대하시는 하나님 (사 1:16-17)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다 백성이 형식적 예배에만 치중하고 실제 삶에선 죄를 범했던 모습을 강하게 책망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형벌을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회복을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에서 돌이킬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1)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회개로의 초대(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1:16)
•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정결케 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죄를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씻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억지로 너희를 씻기겠다”가 아니라, “네가 스스로 씻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를 위한 우리의 의지와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회개의 결단’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시 51:17).
•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회개는 단지 죄를 고백하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죄를 끊어 내는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다음에 회개하면 되지”라든가 “이 정도 죄는 괜찮겠지” 하고 넘어가려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는, 지금, 여기서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계속 반복하고 있는 죄가 있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스스로 씻고, 깨끗하게 하는” 결단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라- 적극적인 순종(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17)
여기서 하나님의 요청은 단지 “악한 행실을 그쳐라”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선행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 “선행을 배우며”: 선한 행실은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과 교회의 훈련과 반복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또 서로 격려하고 책망하며 ‘배워가는 것’입니다.
• “정의를 구하며”: 불의 앞에 침묵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야 합니다.
• “학대받는 자, 고아, 과부를 돌보라”: 당시 가장 약한 계층이었고, 오늘날에는 독거노인·한부모가정·장애인·난민 등 다양한 소외된 이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예배의 연장선”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약자를 돌보고,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그 곁에 서서 함께해 주는 것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약 1:27)
3. 회개의 기회로 초청하시는 하나님(18)
그렇다면, 이렇게 큰 죄를 짓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못하던 백성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실까요?
18절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18)
1)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
•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실 정도로 혹독하게 꾸짖으셨지만, 동시에 “오라!”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는 표현은, 재판장의 심판이 아니라, 변론의 기회를 주시는 은혜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초청하시는 따뜻한 권면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며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 – 죄 씻음의 약속
• ‘주홍’은 붉은색 염료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색을 상징합니다. 아무리 닦고 빨아도 잘 사라지지 않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은 “주홍빛 죄”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해결 못 할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깨끗이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약속을 완성합니다(히 9:22). 우리의 죄를 씻어 내는 방법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어떤 죄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의 무게와 종류를 불문하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무한한 용서와 은혜를 보여 줍니다.
4.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 (1:19-20)
하나님은 백성들을 책망하시고, 회개하여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 뒤, 이제 순종할 것이냐, 불순종할 것이냐에 대한 “선택”을 제시하십니다.
1) 순종에 따른 축복(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1:19)
• “즐겨 순종한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억지나 의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을 의미합니다.
• 그 결과,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영적·물질적·관계적 복을 포괄적으로 의미합니다.
• 신명기 28장
•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니…”라며 구체적 축복을 나열합니다.
• 실제로 하나님 말씀대로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신뢰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세상의 불의한 방법보다 길어 보이고 어려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2) 불순종에 대한 경고(1: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 1:20)
반면, 말씀을 거절하고 배반하는 길을 택한다면, 결국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실제로 역사에서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했고(주전 586년), 긴 포로 생활을 겪었습니다.
• 그러나 심판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돌이키도록 하시는 징계의 방편으로 사용하십니다(히 12:6).
• 하나님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심판을 내리시지만, 그 심판 속에서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여전히 남겨 두십니다(렘 29장에 나타난 포로기 약속 등).
결국, “순종의 길”이냐 “불순종의 길”이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갈래 길을 명확하게 보여 주시고, “네가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물론 세상 방식대로라면, 불의를 행해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얻을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정직과 공의로 걸어가는 자는, 시간을 두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현대에도 정직한 기업가, 성실히 자기 일을 감당하며 이웃을 섬기는 성도들이 오히려 더 지속적이고 건강한 열매를 맺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축복입니다.
결론: 형식의 껍데기를 벗고, 진정성 있는 예배로 나아가자
오늘 이사야서 1장 말씀은 “형식만 남은 예배”를 가감 없이 지적하시며, 동시에 “회복과 순종의 길”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 첫째, 예배가 헛된 형식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죄에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 둘째, 예배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선행과 정의를 배우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약자를 돌보는 사랑의 실천이 바로 예배의 열매입니다.
•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오라!” 하고 초청하십니다. 주홍빛 죄라도 씻으시는 은혜를 기억합시다. 날마다 회개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 넷째, 순종하는 자에게는 풍성한 복과 아름다운 열매가 약속되어 있으며,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따른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시다.
교회 안에서만 착한 척하는 예배자가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사회 곳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약자를 돌보며, 정의를 지키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서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고,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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