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6 수요저녁예배 설교(롬 12:1-8 / 산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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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6-26 21:41
조회3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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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1-2)
2.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3. 각자의 본분을 지키라(4-8)
예배는 성도의 특권이고 동시에 의무이다. 구원받았기에 예배할 수 있고, 구원받았기에 당연히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예배당에 모여서 순서에 따라 드리는 공적 예배가 있다. 또 하나는 교회 밖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몸을 바쳐드리는 영적 예배가 있다.
1절 끝에 "영적 예배"가 나온다. 반대 개념은 육적 예배일 것 같은데, 그렇게 대조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공적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구분해서 설명한 것이다.
1절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공적 예배가 기본이다. 예배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 예배만 드리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이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 마친 후에 교회 밖에서, 가정과 사회에서 삶을 통해서 드리는 생활의 예배가 있는데 그것이 영적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적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먹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 마시는 것, 일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예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예배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삶 자체를 예배처럼 산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올려드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했다. 에녹은 가정을 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그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서 모든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었다.
1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몸을 드리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마음이 중요하지만 몸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에 마음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말 마음이 있으면 몸도 가게 되어 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을 바치기 원하는데 몸으로 예배를 안드릴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마음이 있어도 몸을 드리지 못해서 잘 못하는 것들이 많다. 마음으로는 선교도 하고 싶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싶고, 기도생활도 쉬지 않고 열심히 하고, 항상 감사하며 살고, 원수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생활도 하고 싶다고 하는데, 몸으로 안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면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셨다. 마음으로는 누가 못하나? 마음 먹는 것만 말하면 못하는 사람이 없다. 몸으로 안되니까 못하는 것이다. 본문은 몸을 드리라고 했다. 이것은 마음을 포함한 몸, 우리의 전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몸을 드리라는 것의 깊은 의미는 삶을 드리라는 것이다. 시간을 바치고 나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구약시대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을 제물을 드린다고 표현한다. 그러면 우리의 몸을 불태워 드리라는 것인가? 우리의 몸이 희생이 되고, 헌신 되어서 제물처럼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제물은 자기가 잘못해서 벌받아 죽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것이 구약시대 제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라! 주님이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되셨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 봉사를 하고 손해를 보면서 그 길로 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내가 높아지려고 한다. 성경은 우리 몸을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다. 생활 가운데 희생 헌신하고 남을 위해서 손해 보면서 살라는 것이다. 제물은 죽어야 된다. 죽지 않으면 제물이 될 수 없다. 내가 왜 손해를 보는가? 핑계대고 원망하면 절대로 제물이 될 수 없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누구든지를 강조하고 있다. 목사나 선교사만 지칭하지 않고 모든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런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살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2절
1절에서는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강조했다. 몸을 지배하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려면 마음이 새 마음이 되어야 한다.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면 절대로 산 제물이 될 수 있다. 마음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마 16:4)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0)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 2:15)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해서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음란을 따라가며 살아간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산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다. 이 세상을 따라가면 절대로 영적 예배 드리는 생활을 할 수 없다.
믿지 않는 자들의 생활 습관과 방식을 배우지 말고, 흉내내지 말고, 닮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앞서 가는데 우리는 못 따라간다고, 뒤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길과 우리의 길은 방향이 다르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다. 변화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삶의 목표와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새 마음,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 자신도 노력해야 하지만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야 가능하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6)
새 영,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우리 마음 속에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간섭하셔서 새롭게 만들어주신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가면 새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이고, 완전하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몸을 바치면서 살 수 있다. 삶 자체가 예배와 같은 삶이 된다.
3절
3-8절은 교회 생활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생활을 잘 해야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는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 분수와 자리를 지켜서 생각을 해야 한다. 분수를 넘어서 그 이상의 생각을 하려고 하면 안된다. 왜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고 어려움들이 생길까? 각 사람들이 자기 자리, 분수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분수를 넘어서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나아가기 때문에 갈등이 많아진다.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분수 이상의 교만한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롬 12:16)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마음이 같아진다. 높은 데 마음을 두면 안된다. 도리어 낮은 데 처해야 한다. 지혜 있는 체 하면 안된다. 내 생각이 옳고 내가 하자는대로 하면 다 잘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은 각 사람, 모든 성도가 들어야 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자리에서 내 분수대로 생각하고 생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와 믿음과 직분 등을 믿음의 분량대로 나누어 주셨다.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믿음을 주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크고 많은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은사를 주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그릇에 맞게 적당하게 주신 것이다. 그러면 그 분량대로 지혜롭게 헌신하고 봉사하면 된다. 믿음이 작은 사람이 믿음이 큰 사람을 욕하거나, 믿음이 큰 사람이 믿음이 작은 사람을 무시하면 안된다.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기에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각 사람의 위치와 역할과 기능과 사명이 다르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맡겨주셨다.
4절
우리는 한 몸이다. 교회는 한 몸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이다. 그리스도가 몸이고 우리는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됨의 원리는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수준으로하면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한 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그 원리대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다. 그것처럼 믿는 성도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하셨다.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다. 폐, 간, 장의 기능이 다 다르다. 손, 발, 입, 코, 귀의 역할이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맞추려고 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기능과 역할과 사명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고 그렇게 몸에 붙여 놓으셨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각각 다른 지체를 다른 자리에 세워놓으셨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존중하고 협력하고 사랑해야 한다. 다르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을 비판하려고 하지 말고 조화를 이루어서 몸 전체가 아름다운 기능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른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서로의 생각과 의견과 은사와 믿음과 사명이 다 다르다.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5절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비요 은혜이다. 서로 형제가 되고 지체가 되어서 서로 도와주는 역할을 주고 받는 것이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5~16)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주고 받는다. 지체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연결된 지체 간에 분량대로 역사하고 서로 자라게 한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야 자라난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지 않으면 성장이 멈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다. 서로 연결되어서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한다. 도움을 주고 받는 일을 잘 하면 성장을 잘 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으로 자라가게 된다.
6-8절
각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예언의 은사" 크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선지자와 사도에게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예언이 있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선지자와 사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 그런데 이 계시는 중단되었다. 지금은 성경을 깨달아서 전하면 그것이 예언이다.
"섬기는 은사"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그런 자리에서 열심을 내야 한다.
"가르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가르치는 자리를 잘 지켜야 한다.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 사람은 설명을 하면 더 어렵다.
"위로하는 은사" 어려움 당한 사람, 고난 당한 사람, 병난 사람,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해주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이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구제하는 은사"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성실하게 구제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구제하는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한다.
"다스리는 은사" 지휘 통솔을 잘 하는 은사이다.
"긍휼의 은사"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큰 사람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하셨다.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이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고 섬겨야 한다. 은사는 봉사하라고 주신 것이다. 나무가 자기 열매를 먹을 수 없다. 우리는 내 은사로 남을 잘 도와주어야 한다. 은사로 내가 높여지려고 하면 안된다. 은사로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 안된다. 은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면 안된다. 은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다른 사람도 유익하게 해야 하겠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갖고 하나님께 정해주신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며 사람들을 잘 섬기면서 살아가야 하겠다.
1.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1-2)
2.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3. 각자의 본분을 지키라(4-8)
예배는 성도의 특권이고 동시에 의무이다. 구원받았기에 예배할 수 있고, 구원받았기에 당연히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예배당에 모여서 순서에 따라 드리는 공적 예배가 있다. 또 하나는 교회 밖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몸을 바쳐드리는 영적 예배가 있다.
1절 끝에 "영적 예배"가 나온다. 반대 개념은 육적 예배일 것 같은데, 그렇게 대조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공적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구분해서 설명한 것이다.
1절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공적 예배가 기본이다. 예배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 예배만 드리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이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 마친 후에 교회 밖에서, 가정과 사회에서 삶을 통해서 드리는 생활의 예배가 있는데 그것이 영적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적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먹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 마시는 것, 일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예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예배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삶 자체를 예배처럼 산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올려드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했다. 에녹은 가정을 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그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서 모든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었다.
1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몸을 드리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마음이 중요하지만 몸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에 마음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말 마음이 있으면 몸도 가게 되어 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을 바치기 원하는데 몸으로 예배를 안드릴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마음이 있어도 몸을 드리지 못해서 잘 못하는 것들이 많다. 마음으로는 선교도 하고 싶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싶고, 기도생활도 쉬지 않고 열심히 하고, 항상 감사하며 살고, 원수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생활도 하고 싶다고 하는데, 몸으로 안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면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셨다. 마음으로는 누가 못하나? 마음 먹는 것만 말하면 못하는 사람이 없다. 몸으로 안되니까 못하는 것이다. 본문은 몸을 드리라고 했다. 이것은 마음을 포함한 몸, 우리의 전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몸을 드리라는 것의 깊은 의미는 삶을 드리라는 것이다. 시간을 바치고 나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구약시대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을 제물을 드린다고 표현한다. 그러면 우리의 몸을 불태워 드리라는 것인가? 우리의 몸이 희생이 되고, 헌신 되어서 제물처럼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제물은 자기가 잘못해서 벌받아 죽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것이 구약시대 제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라! 주님이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되셨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 봉사를 하고 손해를 보면서 그 길로 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내가 높아지려고 한다. 성경은 우리 몸을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다. 생활 가운데 희생 헌신하고 남을 위해서 손해 보면서 살라는 것이다. 제물은 죽어야 된다. 죽지 않으면 제물이 될 수 없다. 내가 왜 손해를 보는가? 핑계대고 원망하면 절대로 제물이 될 수 없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누구든지를 강조하고 있다. 목사나 선교사만 지칭하지 않고 모든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런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살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2절
1절에서는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강조했다. 몸을 지배하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려면 마음이 새 마음이 되어야 한다.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면 절대로 산 제물이 될 수 있다. 마음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마 16:4)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0)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 2:15)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해서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음란을 따라가며 살아간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산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다. 이 세상을 따라가면 절대로 영적 예배 드리는 생활을 할 수 없다.
믿지 않는 자들의 생활 습관과 방식을 배우지 말고, 흉내내지 말고, 닮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앞서 가는데 우리는 못 따라간다고, 뒤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길과 우리의 길은 방향이 다르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다. 변화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삶의 목표와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새 마음,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 자신도 노력해야 하지만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야 가능하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6)
새 영,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우리 마음 속에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간섭하셔서 새롭게 만들어주신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가면 새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이고, 완전하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몸을 바치면서 살 수 있다. 삶 자체가 예배와 같은 삶이 된다.
3절
3-8절은 교회 생활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생활을 잘 해야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는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 분수와 자리를 지켜서 생각을 해야 한다. 분수를 넘어서 그 이상의 생각을 하려고 하면 안된다. 왜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고 어려움들이 생길까? 각 사람들이 자기 자리, 분수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분수를 넘어서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나아가기 때문에 갈등이 많아진다.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분수 이상의 교만한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롬 12:16)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마음이 같아진다. 높은 데 마음을 두면 안된다. 도리어 낮은 데 처해야 한다. 지혜 있는 체 하면 안된다. 내 생각이 옳고 내가 하자는대로 하면 다 잘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은 각 사람, 모든 성도가 들어야 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자리에서 내 분수대로 생각하고 생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와 믿음과 직분 등을 믿음의 분량대로 나누어 주셨다.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믿음을 주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크고 많은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은사를 주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그릇에 맞게 적당하게 주신 것이다. 그러면 그 분량대로 지혜롭게 헌신하고 봉사하면 된다. 믿음이 작은 사람이 믿음이 큰 사람을 욕하거나, 믿음이 큰 사람이 믿음이 작은 사람을 무시하면 안된다.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기에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각 사람의 위치와 역할과 기능과 사명이 다르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맡겨주셨다.
4절
우리는 한 몸이다. 교회는 한 몸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이다. 그리스도가 몸이고 우리는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됨의 원리는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수준으로하면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한 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그 원리대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다. 그것처럼 믿는 성도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하셨다.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다. 폐, 간, 장의 기능이 다 다르다. 손, 발, 입, 코, 귀의 역할이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맞추려고 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기능과 역할과 사명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고 그렇게 몸에 붙여 놓으셨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각각 다른 지체를 다른 자리에 세워놓으셨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존중하고 협력하고 사랑해야 한다. 다르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을 비판하려고 하지 말고 조화를 이루어서 몸 전체가 아름다운 기능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른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서로의 생각과 의견과 은사와 믿음과 사명이 다 다르다.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5절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비요 은혜이다. 서로 형제가 되고 지체가 되어서 서로 도와주는 역할을 주고 받는 것이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5~16)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주고 받는다. 지체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연결된 지체 간에 분량대로 역사하고 서로 자라게 한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야 자라난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지 않으면 성장이 멈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다. 서로 연결되어서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한다. 도움을 주고 받는 일을 잘 하면 성장을 잘 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으로 자라가게 된다.
6-8절
각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예언의 은사" 크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선지자와 사도에게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예언이 있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선지자와 사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 그런데 이 계시는 중단되었다. 지금은 성경을 깨달아서 전하면 그것이 예언이다.
"섬기는 은사"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그런 자리에서 열심을 내야 한다.
"가르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가르치는 자리를 잘 지켜야 한다.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 사람은 설명을 하면 더 어렵다.
"위로하는 은사" 어려움 당한 사람, 고난 당한 사람, 병난 사람,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해주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이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구제하는 은사"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성실하게 구제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구제하는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한다.
"다스리는 은사" 지휘 통솔을 잘 하는 은사이다.
"긍휼의 은사"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큰 사람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하셨다.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이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고 섬겨야 한다. 은사는 봉사하라고 주신 것이다. 나무가 자기 열매를 먹을 수 없다. 우리는 내 은사로 남을 잘 도와주어야 한다. 은사로 내가 높여지려고 하면 안된다. 은사로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 안된다. 은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면 안된다. 은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다른 사람도 유익하게 해야 하겠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갖고 하나님께 정해주신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며 사람들을 잘 섬기면서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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