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4 수요저녁예배 설교(롬 15:14-21 / 이방인을 위한 바울의 희생)(윤성천 목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용교회관련링크
본문
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eh77DJysrqo?si=L3Ab437zJbf1E9wv
본문은 사도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그들이 받은 사명, 사도바울이 해야 될 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고, 어떻게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몇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14절
로마 교회 교인들의 믿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한다. 선함과 지식과 권면이다. 이 세가지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있다고 말하면서 칭찬하고 있다.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선함은 선한행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서 올바른 행동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맞는 행동과 삶이다. 세상 사람들이 선하다고 해서 꼭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선한 것이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생활을 잘하면 누구든지 선한 삶을 살 수 있는데, 믿음이 있어도 변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거짓, 사기, 불의가 사라져야 하는데, 변화되지 않는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변화되게 되어 있다. 변화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선한 행동이 가득할 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덕을 세울 수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4)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베풀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빛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믿는 사람이 선함이 없이, 악하고 불의하고 부정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과 사기로 살아간다면 그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그런데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는 선함이 가득했다. 얼마나 그들이 성숙했으면 이렇게까지 표현할까? 우리도 선한 행동을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모든 지식이 차서" 복음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지식이다. 성경을 잘 배워야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른 지식이 없으면 결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왜 이단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사회적으로 무리를 일으키고 가정이 파탄되고 왜 사회적 비난을 받는가? 그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것을 배우다보니 그들의 신앙과 행위가 잘못되어서 많은 무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잘 배워서 말씀의 깊이를 알고 말씀 위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세워져야 한다.
바른 성경 지식을 가져야 신앙이 바르게 자라날 수 있다. 이단의 가르침은 결과가 좋지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면 이단의 가르침을 방어할 수 있다.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이단에게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잘 모르면 이단의 말을 들어도 분별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을 바르게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능히 서로 권하는 자" 선함과 모든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 바른 교리에 입각한 바른 신앙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권면할 수 있다. 선함과 지식을 잘 갖춰야 다른 사람을 바르게 권면할 수 있다.
성도를 대할 때 비난하지 말고 비방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고 존귀하게 여기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약한 자를 권면해서 강하고 담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한다. 시험 들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교회를 떠나게 하는 것은 큰 죄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씀에 입각한 격려의 말을 했는가? 미워하는 말과 가슴에 비수를 꽂듯이 고통을 주는 말을 한 것은 아닌가? 그 사람이 시험에 들도록 말을 하지 않았는가? 살펴봐야 한다.
15절
사도바울이 편지를 쓴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다고 했다. 반복하는 것은 잊지 않게 하고, 기억나게 하고, 진리 속에서 계속 그 말씀대로 살게 하기 위한 의도로 로마서를 써서 보낸다고 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은혜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이다. 그런데 이것을 은혜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자기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을 참으로 깨달은 자는 교회 안에서 대단한 일을 하고 남들 보기에도 많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절대로 교만할 수 없다. 이런 마음을 우리가 가지면 모든 성도들은 큰 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남들이 볼 대 우러러 볼만한 일을 하든,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소소한 일을 하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비등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축복을 주신다.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편지를 쓸 때 주장하듯이 썼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맡겨주셨기에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주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6절
사도바울이 전에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고,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준수하는 흠이 없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고,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적극적으로 핍박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인생과 가치관과 신앙관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공적인 일꾼, 봉사자를 의미한다. 주님이 바울을 부르실 때에는 사사로이 부르신 것이 아니고 공적으로 부르셔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직분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불렀기 때문에 교회에 나온 것이고, 다 섬기라고 부르신 것이다. 일꾼은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라는 뜻인데,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 명예나 출세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일꾼 삼아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하고 그분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 복음 전파자는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역할을 한다. 죄인들이 가지고 온 제물로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했다. 내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해주었을 때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 구원받는 자들이 거룩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를 한다는 것이다. 바울만 제사장인가? 아니다. 우리도 남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헌신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다.
복음 전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기회가 되든, 되지 않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17절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이것이 어떤 자랑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통 우리의 자랑은 자기가 성공한 것, 잘한 것, 뭔가 업적을 이룬 것에 대해서 자랑한다. 그런데 바울의 자랑은 차원이 다른 자랑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한다고 했다.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자랑했다. 오직 예수님이 자랑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그는 잘한 것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노력이나 엄청난 고난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겸손했다.
18-19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을 자랑하는데 그 일을 나를 통해서 하셨다고 했다. 주체는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했을 때 칭찬할만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성과가 아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하신 것이다. 나는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때로 잘못하면 나라고 하는 것이 나타날 때가 있다. 내가 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자꾸 나온다. 알아주면 좋아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한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수고한 것을, 내가 고생한 것을, 주를 위해 희생한 것을 내가 했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사도바울은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을 자랑했다고 했다. 주만 나타내고 자신을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사도바울은 말로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순히 설교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고 행동은 욕심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표적과 기사는 초자연적인 역사인데,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 역사하심,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았다. 표적이 없으면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표적을 말했지만 그래도 인정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았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이 정말 역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은사들을 부여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나게 하셨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이 해나가시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9절 끝에 선교의 본을 말씀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21절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었다. 바울의 이 말은 복음이 전해진 곳에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복음을 널리 전하겠다는 사명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칭찬 듣는 좋은 신앙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바울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일꾼, 제사장의 역할을 한 것처럼 우리도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하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