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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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6 수요저녁예배 설교(사 26:8-19 /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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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5-04-18 12:48 조회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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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bq1yEZhEjo4?si=HG_JCKCQDZF5I9_8


(설교요약본)


서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찬양 (1-7절)

이사야 26장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찬양시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이미 멸망을 당했고, 남유다 역시 바벨론에 의해 멸망이 예고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최후는 멸망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입니다.

1절에서는 “그 날”에 부르게 될 찬송이 나옵니다. 그날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날이며, 이스라엘은 무너진 성벽과 폐허를 바라보면서도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라고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보호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2–3절에서는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와 “심지가 견고한 자”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곧 신의를 지키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십니다.

4–6절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교만한 자들과 강대국들이 무너지고, 억눌렸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를 얻게 됨을 말씀합니다. 이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는 승리의 예표입니다.

7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자의 길이 정직하고, 마침내 평탄한 길로 인도됨을 선언합니다. 요셉의 삶처럼 억울하고 절망적인 길 같아 보일지라도, 믿음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의 섭리가 평탄한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1. 심판하시는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림 (8–11)

8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심판하시는 길’에서조차도 주님을 기다리며, 주의 이름을 사모한다고 고백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환난 중에도 주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그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9절은 밤에 주를 사모하고, 중심이 간절히 주를 구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깨닫게 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고난 중에 “왜 이런 일이?”가 아니라 “무엇을 뜻하시는가?”를 묻는 자에게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납니다.

10절은 악인의 대조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어도 의를 배우지 못하며, 정직한 땅에서도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지만, 그 은혜에 응답하지 않는 자는 결국 멸망합니다.

11절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조차 악인이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열성’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여기서 ‘열성(킨아)’은 불타는 사랑, 곧 독생자를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2. 스스로 영광을 얻으실 주님만을 의지함 (12–15)

12절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평강을 주시고, 그들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로마서 8:28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13절에서는 이방의 지배 아래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불렀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게 역사한다 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14절에서는 멸망당한 이방 나라는 죽은 자가 되어 기억에서조차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회복과 구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15절은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또 더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반복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는 현실을 선포합니다. 민족적 이스라엘은 작을지 모르지만,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는 온 땅에 확장되고 있습니다. 복용교회 또한 지역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사명을 받고 있습니다.


3. 구원과 죽은 자의 부활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 (16–19)

16절은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앙모’라는 번역은 히브리어 ‘파카드’에서 왔으며, ‘기억하다, 방문하다’는 뜻을 갖습니다. 이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억하고, 간절히 그 얼굴을 구하는 신자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17–18절은 산고를 겪는 여인처럼 유다 백성이 심한 고통 중에 부르짖지만, 결국 바람을 낳은 것처럼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절망을 표현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절박한 상황을 비유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19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조차 깨어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며,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는 부활의 날이 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건기에 말라붙은 땅도 이슬이 내리면 생명을 되찾듯, 죄와 심판으로 말라붙은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슬처럼 임하면 중생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에스겔의 환상처럼, 완전히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맺음말: 고난의 끝은 부활의 승리입니다

이사야는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나는 소망을 선포하며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고난 주간에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난 너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며, 그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살아났고, 다시 일어났고,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원히 부를 승리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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