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목사님설교

20241016 수요저녁예배 설교(약 2:8-13 / 차별하지 말아야 할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10-16 21:23 조회120회 댓글0건

본문

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bOdVvyxS3fo?si=FvGSAPP-J4q7xnye


지난 주에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을 배웠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약 2:1)

중요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불신 세상을 보면 차별이 엄청 심하다. 재력, 학력, 권력 등의 조건을 보고 차별을 한다. 겉모습으로 차별하는 것은 악하고 죄악된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차별하지 말아야 된다고 했다. 본문을 통해 차별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몇가지로 말씀한다. 


8절

야고보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전에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성경에 기록된대로"라고 했는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수천년 전 구약성경에 이렇게 말씀을 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법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살아가며 지켜야 될 말씀이다. 

예수님은 구약 전체를 아울러서 율법의 핵심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가지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이 말씀을 지키면, 순종하면, 실천하면 잘하는 것이라고 했다. 칭찬 받고 복 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고의 법"이라고 하셨다.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 가장 높고 존귀하신 하나님이 주신 법이라는 의미도 있고, 법 중에서도 가장 높고 큰 계명이라는 의미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은 큰 죄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그런 죄를 짓지 않았으니 큰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본문은 살인, 간음, 도둑질도 물론 죄이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최고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살인할 수 없고, 간음할 수 없고, 도둑질 할 수 없다. 사람을 미워하고 차별하면 최고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살인이나 간음이 최고의 법이 아니라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중요한 계명을 지키고 순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순종하지 않으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4~15)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형제 사랑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사망에 속했고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죄와 흑암 가운데서 살던 자였다. 거기에서 구원을 받아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것을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안다고 했다. 반면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형제 사랑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설명한다. 가벼운 것이 아니고 시시한 것이 아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고,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헀다. 형제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다. 영생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사랑의 문제와 생명 문제를 연관시킨다. 그만큼 이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1)

예수님을 믿는 자는 거듭난 자이다. 그런 자에게는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이다. 내가 구원받은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나를 구원하시고 낳아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에게서 난 자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이웃 사랑은 단순히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안하고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고 최고의 율법을 지키는가에 연관된 문제이고 영생을 얻은 증거와 연관된 문제이다. 


9절

만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다. 율법이 범법자로 정죄한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믿음에서 떠난 증거이고 율법을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것이다. 사람을 차별하면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10절

율법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 율법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율법 하나하나가 원형 쇠고리라고 생각할 때 다 지키다가 어느 것 하나만 지키지 못해서 끊어지면 쇠줄이 떨어지게 된다. 하나만 어겨도 땅에 떨어지게 된다. 하나 때문에 모두를 범한 자와 똑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차별하면 다른 모든 것을 지켰어도 다 못지킨 것이 된다. 한 말씀을 무시하면 안된다. 하나 때문에 나머지 것이 다 떨어진다. 전체를 못한 것처럼 취급되고 만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613가지라고 하는데, 노력해서 612가지를 지켰어도 하나만 못지켜도 전체를 못지킨 것이 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람을 외모로 대하게되면 차별할 수 밖에 없다. 내 마음에 드는 자에게는 온갖 좋은 것을 다 해주면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자에게는 무자비하고 냉정하고 싫어하는 모습으로 대한다. 이런 차별이 나에게서 없어져야 한다. 이것을 초월해야 한다. 모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말씀을 지킬 때 취사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포기하면 안된다. 말씀은 내가 골라서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은 쉽고 어떤 것을 어려울 수 있다. 부담되는 말씀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다 지켜야지 마음에 드는 것은 지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도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 잘 안되면 복종이라고 해야 한다. 


11절

10절의 내용을 풀어서 다시 설명한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간음을 하지 않았어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어긴 자가 된다. 주일 성수 하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주일 성수 잘하고 기도 열심히 했어도 이웃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어긴 것이다. 내가 지킨 것만 생각하면서 나는 이것도 저것도 지켰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다 지키길 원하신다. 모든 말씀을 다 순종하길 원하신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고 주일도 성수하고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다. 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다. 모든 말씀을 주신 분이 한분 하나님이시다. 모든 말씀을 다 중요하게 여기고 잘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못하고 있는 그것 한가지, 사람 차별하고 이웃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지켜야 한다. 


12절

"자유의 율법" 자유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신약의 복음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지켜야 될 것이다. 최고의 법이다. 믿는 자들이 사랑으로 지키고 순종해야 될 법이다. 성도들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났다. 거듭난 성도의 영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씀 순종하는 것을 기뻐한다. 중생한 영은 말씀과 짝이 맞다. 그래서 자유의 율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에 심판이 따른다. 우리의 행동에 심판이 따른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죄사함을 받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공의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 받았다. 그것을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심판이 있다고 했다. 죽은 후에 심판 받는 공심판은 받지 않지만 이웃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차별하고 복음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지 못하면 거기에 대한 심판이 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심판이 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이 말과 행동이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 안된다.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6~37)

무엇을 심판하신다고 했나? 무익한 말을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심판하신다고 했다. 말을 그냥 막 해버리면 안된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4)

인생에 대해서 다 논하고 결론을 말하고 마지막 방점을 찍은 것이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사람이 심판이 없으면 두려움이 하나도 없이 마음대로 다 해버릴 것이다.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막 살 것이다. 그런데 심판이 있다. 


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긍휼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짓고 악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긍휼을 행하라고 했다. 긍휼을 행하면서 살아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야고보서 2장의 내용이 차별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웃 사랑을 하려면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는 없다. 내 마음에 들 정도로 완전한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도 마음에 안드는데 다른 사람이 내 마음에 들겠는가? 내 마음에 들더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 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바라볼 때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받아주고 품어주고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 전에 예수님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다. 평생 갚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였다. 그만큼 큰 죄를 지은 우리인데 주인이 탕감해 주셨다. 용서하고 받아주셨다. 그런 긍휼을 입었으니 나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주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 모질게 굴지 말아야 하는데 용서 받은 자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것을 알고 주인이 이 사람을 가두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신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될 대상이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만약에 긍휼을 행하지 않는다면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헀다. 다시 일만 달란트 내놓으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내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일만 달란트를 다시 갚으라고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안되겠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심판을 이기는 것이 긍휼이다. 우리가 다 잘못하고 실수하고 죄를 짓고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많이 베풀면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다. 만약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한마디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부족하고 잘못한 것이 많고 죄만 짓고 실수만 하고 못된 짓만 하고 왔으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면 살 것이고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큰 일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주님이 죄인들을 보실 때 긍휼히 여기셨다고 했다. 긍휼히 여기셔서 고치시고 먹이시고 기적을 베푸셨다.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믿음을 가져서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면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